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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없는 사회

진정한 소통이 필요한 시간

by 엄재균

장면 1


2010년 한국에서 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연설 후에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요청했다. 근데 한 명의 기자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의아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통역이 필요하다면 통역도 가능하다고”하는 순간, 엉뚱하게 중국 기자가 아시아를 대표하여 질문을 하겠다고 나선다. 오바마 대통령이 현명하게 “나는 한국 기자에게 기회를 주었다”라고 했다. 이 중국 가자는 다시 과감하게 “한국 기자들에게 제가 대신 질문해도 되냐고 물어보면 어떻겠냐”라고 당당하게 요청한다. 오바마는 “한국 기자들이 질문하고 싶은지에 달렸다”며 “누구 없나요?” 묻는다. 다시 정적만 흐르면서 조~용~

결국 중국인 기자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보고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현장에는 없었지만 내가 부끄러웠다.

EBS 방송국에서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에 나오는 일부 영상을 보면서 이 상황을 알게 되었다. 기자의 업의 본질은 질문을 하는 것인데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은 기자의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다니. 아니 특권이 아니라 엄청난 권력이다. 누구에게라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기자이다. 근데 질문이 없다니.


<미디어오늘>의 이정환 기자는 나중에 이 해프닝에 대해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 참석한 기자들의 얘기를 종합하여 대변하였다. “오바마가 질문을 던진 줄 예상하지 못하였고 도중에 중국 기자가 가로채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질문할 기회를 놓쳤다”라고 한다. 영어 울렁증에 대한 불안감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나의 판단은 다르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영어로 질문해야 하는 부담감과 함께 ‘질문이 틀리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 엄청난 자리에서 ’혹시나 쪽 팔리기 싫다 ‘는 마음도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동안 수없이 목격한 장면이 아주 특별한 순간에 미국 대통령 앞에서 자연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질문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왜?

남의 눈치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기자들마저 올바른 질문을 찾았기 때문이다. ‘질문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아주 간단한 명제도 기자들마저도 체득화가 되지 못했다.


장면 2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회장들이 범법 행위로 인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될 때 취재경쟁이

치열하다. 예전에는 포토라인에 서서 간단하게 “검찰에서 성실히 답변하겠다”는 하나마나한 소회를 밝히고는 안으로 들어가려면 주위에 온통 기자들이 붙어서 또 하나마나한 질문을 한다. “죄를 인정하느냐,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느냐” 등 답변을 듣고 싶은 게 하니라 그저 질문을 한 건이라도 해야 하기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기자들끼리 서로 몸싸움을 하면서 질문을 하려고 검찰 청사 안에까지 난리법석을 떨면서 쫒아가서 질문한다.


질문을 해야 할 장소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정작 질문이 그다지 필요 없는 곳에서는 하나마나한 질문을 끊임없이 한다.


똑같은 장면이 매번 반복된다. 왜 이럴까?

습관이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한다.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고 기자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원인을 찾으려면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까지 되돌아 가야 한다.

나 역시 이런 문화에 젖어 살아온 세대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는 질문하지 않는다고 겁박만 했지 그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다. 심지어 질문하는 학생에게는 특별 가점을 준다고 해도 겨우 한두 명만 나선다. 교실에서 “질문 없나요?”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드디어 끝나는 시간이구나’라고 일어설 준비부터 한다. 우리의 현실이다. 이제는 ‘왜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검찰청 앞의 기자들처럼 남들이 하니까 그냥 관성적이고 습관적으로 다닌다.


사실 이러한 풍경은 학교 교실뿐만 아니라 회사 임원 회의실에서도 자주 보던 분위기다. 기업에서는 회장이나 사장이 임원회의를 소집하면 ‘또 군기를 잡기 위한 시간’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회의에서는 회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직도 기업과 관공서에서 하는 임원 및 고위간부 회의는 사실 회의가 아니다. 경영진이나 고위공직자가 보고를 받는 자리다. 무엇을 위해?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실무진끼리 하는 회의를 한다면, 가끔은 격론도 벌이고 서로 설득하기 위해 노력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경영진이 나타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생각을 말할 분위기가 아니다. 보고자와 경영자만 말할 뿐이다. 이건 회의가 아니고 그냥 시간만 낭비한다. 이러한 문화에는 회의를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착각하는 못된 습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회의문화도 많이 개선되었다.

삼성전자에 말단사원으로 들어가 CEO까지 올라간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이 쓴 <초격차>에서 회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 “저는 회의시간에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지시는 많이 하지 않고, 질문을 많이 한다. 둘째, 회의를 위한 회의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셋째, 회의를 정시에 시작하고 약속된 시간에 끝낸다.”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권오현 상임고문은 책에서 대안까지 제시한다.


“저는 그 부서장 혹은 팀장들에게 순서대로 물어봅니다. 이번 결정을 어떻게 내리는 것이 좋을지 각자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냐고 먼저 물은 다음, 반드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물어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이유를 알아야 상대방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략) 모든 결정은 제가 최종적으로 내리지 않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우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설령 본인의 판단에 자신이 있어도 다른 의견이 도출될 때는 시간을 두고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의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삼성전자가 초일류기업이 된 이유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은퇴가 가까이 오니, 협회나 공공기관 회의에서 위원장을 맡아 회의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권오현 상임고문의 세 가지 원칙을 항상 되새긴다.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작업은 내면에서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집에서도 소통의 문화를 조금 바꾸어 보려고 시도했다.

가족이 외식을 하고 근사한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다. 아니 내가 먼저 상황을 얘기했다. 돈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 더욱 조심스럽다.


나의 재정상태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너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경제적으로 독립할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역시 분위기가 싸~하다. 보충 설명을 했다. 다들 결혼도 해야 하니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자는 의도라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 먼저 큰 딸이 자신의 재정 상황을 얘기한다. 아주 진지하게 설명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확실한 개념을 갖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어 둘째 딸도 얘기를 자연스레 이어간다.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터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회사에서, 학교에서 겪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질문만 하고는 그들의 고민을 듣고 그 의견을 존중했다. 대화를 다 끝내는 과정에서 다시 제안했다, 이런 기회를 매달 한 번씩 갖자고 하니 다들 ‘좋아’라 했다. 사실 고백하건대 이렇게 가족 간에 진솔한 대화는 지금까지 처음이다.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사회가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중뿔나게 나서고 나대면 먼저 매를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속담에 익숙하다. 누군가 질문하면 ‘쟤는 답도 없는 질문을 한다’, 혹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다’고 핀잔을 주어서는 안 된다, 질문은 그 자체로 완성된다. 질문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할수록 사람들은 입을 닫아 버린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더 눈치가 빠르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

기업과 정부에서도 권오현 상임고문과 같이 원칙을 갖고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


질문이 없는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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