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녀와 당신을 위한 ‘노모포비아’ 디톡스 방법
아뿔싸!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
강의시간에 쫓겨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일단 포기하고 운전을 계속하면서 간다. 조금 가다가 갑자기 강의에 필요한 자료가 생각났다. 전자 교탁에 설치하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면 강의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학과 실습 조교에게 세팅을 부탁하기 위해 전화기를 찾는다.
‘아차!’ 전화기를 놓고 왔지.
할 수 없다.
포기하고 운전을 계속한다. 청담대교를 건너 강북강변에 접어들면 굽이쳐 흐르는 한강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운전할 때의 ‘핫스폿’이다. 아기자기한 맛은 없다. 걸어 다니면서 즐길 수 있는 스케일은 아니어도 굽이쳐 흐르는 한강은 볼수록 웅장하고 멋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어제 산책길에서 즐겨 들었던 ‘팬텀 싱어’에서 불러 히트한 “Il libro dell’amore” -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아주 독특한 음률과 음색의 노래다. 우승팀은 이태리 원곡보다 해석을 더 잘했다. 강북강변에 차도 막히는데 ‘한번 들어 볼 까’ 하는 순간,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연결이 끊겼다. ‘세상의 모든 네트워크와 나는 단절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순간 무인도에 있는 듯하다. 지난겨울 한라산에서 핸드폰이 먹통이 되면서 새로 산 스마트폰이다.
그 겨울 혼자서 한라산을 올랐다.
제주 한 달 살기가 인기가 있을 때였다.
아내와 함께 제주에 내려와 애월읍에서 2주일 지내다 아내는 친구들과 다른 일정이 있어 먼저 올라갔다. 나 혼자 표선으로 숙소를 옮겨 열흘을 더 보냈다. 아내와 걸었던 사려니 숲길이 좋아 며칠 만에 다시 걸었다. 숲길은 종일 걷기만 해도 몸이 치유가 되는 것을 느낀다.
다음 날부터 폭설이 이틀간 계속 내렸다.
내가 묵은 숙소는 한적한 시골에 있는 일층은 북카페이고 이층에 숙소가 2개 있다.
아무 곳에도 나가지 못하고 2층 숙소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현관문조차 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왔다. 창 밖으로 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환상의 백색 세상이다. 혼자 책도 보고 음악을 들으며 고립을 즐기며 지냈다. 그 즐거움은 딱 이틀만 누렸다.
둘째 날이 지나니 조금 지겨워졌다.
셋째 날은 날씨가 풀린다고 하여 산행 준비를 했다.
그러나 등산로가 폐쇄되었다.
나흘째 등산로가 개방되어 겨우 산행을 할 수 있었다.
폭설이 내린 뒤라 가장 짧은 영실코스를 택했다. 산 아래는 날씨가 좋아 발목을 감싸는 등산용 스패츠도 착용하지 않고 아이젠만 등산화에 끼우고 올라간다. 조금 올라가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을 뿌린다. 바람까지 분다. 산행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오히려 호젓하니 더 좋다. 오랜만에 혼자서 산행하니 느낌이 새롭고 상쾌하다. 산 중턱 이상을 올라간 것 같다. 비바람이 더욱 거세다. 폭설로 내린 눈에 발이 무릎까지 쑥 빠지는 곳도 있다. '욱~!'
혼자서 잠시 '끄응' 거리면서 다리를 뺀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 살짝 겁이 난다.
'만약 조난이라도 당하면...?'
비바람이 거세니 바지가 젖어 아랫도리가 차갑다. 판초도 없다. 고민이 된다. 그냥 여기서 내려갈까? 내가 지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추운 겨울에 이 짓을?’ 속으로 묻는다. ‘아니야,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마음을 다잡고 계속 올라간다. 바람이 더 세진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이제 아랫도리가 다 젖어 바지가 몸에 척 달라붙고 팬티까지 물기가 치올라 온다.
고지가 바로 저 긴데, 마침 내려오는 사람이 있다.
“저기 윗세오름까지 비바람이 어떠냐고?”
물었다.
자기도 올라가다가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한다. ‘어떡하나?’ 대학시절 한라산에서 초저녁 무렵에 하산하면서 길을 헤매어 한참을 고생한 기억이 났다. 혼자서 사고라도 나면, 목숨 걸 일이 아닌 것 같다. 깔끔하게 포기했다. 마침 휴식 장소가 있어 거기서 기념사진이나 찍고 내려 가자.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긴다는 일념으로 동영상까지 찍어 댔다. 그리고 내려왔다.
등산로 입구 매점에 들어 우선 허기부터 해결한다.
추운 비바람에 떤 몸을 녹이면서 허겁지겁 해장국을 먹으면서 아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갑자기 먹통이다. 이럴 때는 재부팅하면 된다. 첫 화면이 다시 나온다. '역 쉬~!' 그러나 사진 폴더를 여는 순간 화면 색상이 깨지면서 다시 깜깜해진다. 이럴 경우는 아이폰은 완전한 ‘셧다운’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강제로 ‘셧다운’ 시켰다.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 추위에 떨었던 한기는 어디 가고 갑자기 목덜미가 후끈하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방법이 없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탔다.
숙소를 가려면 네비를 찍어야 하는데 핸드폰이 먹통이라 사용할 수도 없다. 숙소도 바로 며칠 전에 옮겨서 장소도 낯선 ‘표선면’에 있다. ‘내 차에도 네비가 있지?’하고는 네비를 작동한다. 오래전에 차를 사면서 영업사원으로부터 네비 작동법을 배웠지만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입력 방법도 원시적이라 영원히 사용하지 않을 기기라 내팽개쳤다. 이제는 갈 길이 막막하니 ‘원시 네비’라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찬찬히 검색어를 입력한다.
주소를 몰라 숙소 근처 ‘표선면사무소’를 검색하려고 ’ㅍ’을 찾는다 화면에서 ‘ㄱ, ㄴ, ㄷ’을 일일이 다이얼로 돌려가면서 찾아 엔터키를 눌러서 ‘ㅍ’을 입력한다. 모음은 별도의 화면으로 넘어가야 한다. 시작하자 말자 열불이 난다. “십팔 색깔 크레파스”가 저절로 나온다. 겨우 목적지를 입력하고 엔터를 치는 순간 뭐가 잘못되었는지 검색어가 홀라 당 날아갔다. 다시 원 위치로 돌아왔다.
허걱!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작동이 되는 순간에 등줄기에 땀이 차이는 것을 느낀다. 다행이다. 나의 현재 위치를 알았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았다. 내가 안 것이 아니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가 알려 주었다. 디지털 기기가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와 나의 인식을 확장하여 주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인식을 확장시킨 것이 아니라 길을 찾기 위한 지도의 그림을 그리는 능력을 나에게서 빼앗아 갔다. 아무튼 네비를 따라 숙소를 향해 느긋하게 가기만 하면 된다.
도로 표지판을 보면서 운전하니 그제야 “표선면” 안내가 나온다.
낯이 익은 “표선 생활체육관”이 보인다. 다시 얼마를 갔을까? 도로 표지판이 보이면서 다시 큰 길이 나온다. ‘올커니, 저 길로 가면 될 것 같다’ 그 순간 네비 아가씨는 고운 목소리지만 약간은 명령조로 “직진~하세요”를 외친다. 순간, 아니 저 큰 길인 것 같은데? 그래 ‘아내 말과 네비 아가씨 말을 잘 들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 하면서 약간은 도도한 목소리의 아가씨 안내에 따라갔다.
한참을 꼬불꼬불한 길을 가다가 아까 보았던 큰 길이 다시 나타난다. 왔던 길을 다시 뺑뺑 돌고 있었다. 고장 난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았던 것이다. 바닷속에 난파선이 표류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스마트폰에 의지하고 살았는지 돌아보았다. 스마트폰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겨우 숙소에 도착하니 휴일이라 아무도 없다. 어젯밤 옆 숙소에 여선생님이 단체 모임으로 와서 떠들썩했는데 지금은 조용하다. 떠났나 보다. 다음 날 숙소 북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에게 물어보니 핸드폰 수리하려면 제주시로 나가야 한 단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서울로 미리 올라 간 아내와 통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빌렸다. 그나마 유일하게 기억하는 전화번호다. 그마저 기억을 못 했으면 세상과 완전한 단절이다. 통화음이 울린다. 이틀 만에 바깥세상과 처음으로 연결되었다.
사정을 얘기하고 친구들과 여행 잘 다녀오라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숙소에 올라가 점심을 먹으려고 부엌 싱크대를 보았다. 그저께 먹고 남았던 떡만둣국이 불어 터져 있다. 더 한심스럽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인데. 팔을 걷어 부치고 설거지를 한 후 가볍게 라면으로 점심을 때운다. 이제 핸드폰을 고치러 제주시까지 가야 한다. 마침 함께 가져간 갤럭시 패드를 사용하여 미리 제주시 서비스센터까지의 경로를 스크린샷으로 저장하고, 머리에도 입력한 후 제주시로 출발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서비스센터에 도착해 확인했다.
핸드폰에 물이 들어가서 작동이 멈추었다고 한다. 어제 한라산에서 기록하겠다는 일념으로 비바람을 맞으면서 사진을 찍다가 빗물이 들어간 것이다. 방수가 되지 않는 모델이라고 한다. 새로 나온 신상품은 방수까지 된다고 수리기사가 은근히 사라고 조언을 준다. 새로 사던가 아니면 ‘리퍼’를 받아야 한다. 거금을 투자하여 새로 구입했다.
스마트폰이 새로 개통되는 순간 세상과 다시 연결된 느낌이었다. 이 요물 기기가 내 신체 일부가 되었다. 내 몸에 감각기관이 하나 더 생기고 뇌기능의 일부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가 또 생겼다. 동기화 작업을 하지 않아 메모장에 적어 놓은 수많은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차치하더라도 모든 연락처가 홀라 당 날아갔다. 아내의 핸드폰 번호 외에는 기억나는 전화번호가 없다. 그동안 나의 뇌는 자기 할 일을 스마트폰이 대신하여 그 기능이 쇠퇴하고 있었다.
한라산에서의 생각의 고리를 끊고 다시 강북강변으로 돌아왔다.
혹시 급한 전화는 오지 않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약간 불안해진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스마트한 전화에 의존하며 살았는지. 내가 스마트폰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전화번호도 아내 것 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는 갈수록 진화하는데 나의 뇌 기능은 점점 퇴화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예전에는 스마트폰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이 요물은 편리하지만 육체적인 문제까지 일으킨다. 거북목 현상으로 청춘들이 벌써 목디스크로 고통받고 있다. 시력에도 지장을 초래한다.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폐해를 준다.
스마트폰이 없을 때 초조하거나 불안감을 느끼는 증상을 ‘노모포비아(No Mobile-phone Phobia)’라고 한다.
일종의 휴대전화 금단현상이라 할 수 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연구를 통해 스마트폰 중독의 정도를 측정한 후 점수로 환산하여 중독 수준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왔다. 나의 중독 상태가 궁금하여 20가지 항목에 답을 한 후 점수를 확인하니 140점 최댓값 중에 91점이 나왔다. ‘중간 정도의 노모 포피아’ 상태로 나왔다. 100점이 넘으면 ‘중증 중독’ 수준으로 심각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 역시 중독 상태였다.
평소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급하게 연락을 해야 하는 생각이 떠 오르거나 ‘톡’이 오면 신호대기로 정차를 하면서 톡을 확인하고는 문자를 쓰기 시작한다. 신호가 떨어지고 나서 차를 운전하면서도 계속 문자를 하다가 위험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는 가슴을 쓸어 낸 후 ‘앞으로 자제해야지..’ 하면서도, 어느 순간 또 운전 중에 스마트폰을 보는 경우가 있다.
아내가 몇 번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하게 되니까 중독상태라는 것은 확실하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금단현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일부러 ‘디지털과의 이별’을 연습하는 것을 추천한다.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먼저 스마트폰 중독을 인정함으로써 고치려는 노력이 그 출발점이다.
스마트폰 중독에 따른 폐해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게임과 유튜브 동영상은 볼 때는 후두엽에서 시각정보를 받아 뇌의 앞부분인 전두엽에서 그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영아기인 2세까지는 후두엽에서 시각정보만 처리하기 때문에 사물을 보더라도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유아기(3~6세)에 접어들면서 언어 능력과 함께 시각정보를 전두엽에서 식별하고 해석하는 학습을 한다.
아이들의 학습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때이다.
스마트폰 화면의 캐릭터나 동영상 콘텐츠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하고 바로 화면이 넘어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전두엽에서 깊이 있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게임이나 동영상 정보는 시각정보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전두엽 기능을 활성화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뇌의 중요한 기능인 사고력과 기억력 및 학습능력이 발달할 수 없다.
독일의 뇌의학자 만프레드 슈피처 박사는 수많은 연구결과를 근거로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디지털 치매”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지어 “구글은 인간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스마트폰이 인간의 일상 활동을 편리하고 즐겁게는 해 주었지만 과연 인간에게 어떠한 궁극적인 효용가치를 주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단점에 대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 중독은 담배를 끊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고치기는 쉽지 않다. 좋지 않은 습관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 해로운 결과가 당장 내 눈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0년 혹은 20년 이상 지나야 서서히 그 ‘마각’이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아이폰 3G를 출시한 시점이 2009년 11월 말이다. 겨우 10년 조금 지났다. ‘거묵 목’, ‘엄지병’ 등의 사소한 질병이 나타나고 있고 있지만 몸과 마음에 치명적이지는 않다.
앞으로 5~10년 후, 유아기와 소년기를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스마트폰 중독과 관련된 육체와 정신을 함께 갉아먹는 새로운 질병들이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피해자는 우리의 자녀들이다. 지금 20대 이후는 유년기 시절에 스마트폰의 동영상과 게임에 많이 노출되지 않았던 세대이다. 그러나 10대 이하는 태어나면서 영유아기 시절부터 스마트폰을 보고 사용한 세대이다. 사람은 코 앞에 문제가 닥쳤을 때 화들짝 놀라면서 돌이켜 반성한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오히려 시간이 나면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놀아주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어릴 때는 특히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한쪽으로 부하가 과하게 걸리면 몸의 균형을 잃어버린다. 육체와 정신에 병이 찾아온다. 성인들 또한 스마트폰에 빼앗긴 시간에 요가와 운동을 하거나 야외에서 걷고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
가끔 가족모임을 위해 만나면 아이들은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본다. 뭘 보는지 궁금해서 보면 유튜브를 통해 게임을 직접 하지는 않고 게이머가 게임하는 것을 내레이션과 함께 보고 있다. 영상만 많이 보면 글을 알아도 책 속의 긴 글자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자랄 수 있다. 어린아이들의 중독성은 심각할 정도이다. 청소년과 어른도 그에 못하지 않다.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스몸비’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최소한 초등학교까지는 스마트폰보다는 피처폰을 권장한다.
나의 경험을 근거로 성인들의 중독증상을 해독하는 방법으로 ‘만보 걷기’를 추천한다. 걷기와 함께 책 읽고 글 쓰는 시간도 가지기를 권유한다. 지난번 브런치에 소개한 “만보 걷기 그 후 3년”이라는 글을 통해 나의 일상이 바뀌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디지털 북을 볼 수 있어 좋다. 책을 따로 지닐 필요 없이 언제든지 볼 수 있어 편리하다. 기억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스크린샷을 이용하여 찍은 후 해당 칸에 줄을 긋고 간단하게 느낀 점을 적어 메모장에 저장한다. 스마트폰을 잘 활용하면 책 읽기가 무척 편리하다.
최근 10년 사이에 책 읽는 사람이 급속히 줄었다. 내용이 긴 소설을 멀리 한다. 그렇다고 짧게 쓴 시를 읽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140자로 제한한 트위터가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는 15초 동영상이 유행하고 있다.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야 할 책이 사라진 우리 손에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려져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우리나라 문맹률은 프랑스와 함께 1퍼센트 나왔다. 국민 모두가 문자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인 '문해력'은 OECD 국가에서 하위권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부모들과 사립학교에서는 중학교 1학년으로 올라가지 전에는 IT기기를 금지한다고 한다.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발도르프학교’는 창의적 사고, 주의력, 사회성 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스마트폰을 포함한 디지털 기기를 학교에 가지고 오지 못하게 한다. 동영상과 이미지에만 과다하게 노출되면 사고력도 떨어지고, 친구들과 신체 활동이 줄어들어 들기 때문에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중독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노는 습관을 들이는 학습과정을 통해 사회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 책에 있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두엽이 적극적인 활성화 해야 한다.
사고력과 창의력이 향상하는 이유이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저커버그는 회사의 미션이 “지구촌 모든 사람을 연결하여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트위터나 유튜브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간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의도대로 가지 않는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소통하지 못하고 벽을 만들고 차단한다.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의 추천 콘텐츠들의 알고리즘이 자기가 보고 듣고 싶은 것에만 빠지게 되는 편식을 증폭시킨다. 상대방의 다른 생각을 접해볼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이런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사람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내 주위에는 트럼프를 비난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 반대자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 한다. 우리나라도 “국민의 반은 어디 있느냐” 고 서로 묻는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확증편향’을 가진 ‘포노 사피엔스’가 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음란물 접속률은 OECD 1위, 자살률 1~2위, 독서율은 꼴찌다.
고치는 방법은 없는가?
‘발도르프학교’에서 일정부분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출근한 날, 집에 돌아와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전화 한 통화 없었다. 광고성 문자와 톡만 잔뜩 남아있다.
나와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삶과 미래를 위해 어떻게 해야 균형있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