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는 없을까?
런던에서 ISO 국제표준화 회의가 있어 방문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쉬는 날에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갔다.
이곳은 화력발전소를 개조하여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 하루에 많은 작품을 보려고 욕심을 내다보면 어느새 지친다. 그럴 때는 템즈강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6층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쉰다. 잠시 몸을 충전하여 다시 작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물론 전시한 현대미술 작품도 좋았지만 특별한 장면이 기억이 남는다. 어느 전시장 홀 바닥에서 어린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서로 얘기하면서, 그러나 조용히 노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렇게 어릴 때부터 즐겁게 놀면서 작품과 친해질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웠다.
우리는 가끔 유명한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찾아가서 기대했던 감탄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으면 속으로 실망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아직 안목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예술은 어릴 적부터 접해본 감각적인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 순간의 느낌을 몸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감각을 통한 느낌과 해석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열린 감각으로 수용하고 더 많이 보고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언젠가는 타자의 감동과도 연결되어 심미의 세계와도 소통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영혼의 미술관>의 저자 알랑 드 보통은 책을 통해 도슨트 역할을 하면서 우리를 예술의 세계로 초대한다. “예술이 우리의 타고난 약점들,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심리적 결함이라고 하는 약점을 보완해준다”라고 한다. 맞다. 예술은 우리에게 치유와 자기 이해를 통해 감동을 전한다. 그는 예술이 어떻게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다시 시간을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돌린다.
무슨 전시인지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시장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몰려 있다. 한 손에는 작은 노트를 들고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지긋이 감상할 시간이 없는 모양이다. 가만히 친구들끼리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숙제를 하고 있다. 대화가 살며시 귀에 들려온다.
“이 방은 과제에 없는 거야..”하면서 친구에게 빨리 다른 방으로 이동하자고 재촉하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급하다. 즐길 시간이 없다. 숙제를 하려고 분석하려는 순간 즐거움은 사라진다. 중학교 때인가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읽고 여기서 ‘님이 누구냐 ‘는 4지 선다형 시험문제를 받고 당황한 기억이 난다. 시를 어떤 틀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 순간부터 시를 음독하는 즐거움은 사라졌다.
예술을 즐기고 스포츠를 좋아하려면 어릴 때부터 배우고 몸으로 경험하고 즐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녀에게는 어릴 때 스포츠와 예술을 많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중에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더욱 바람직하다.
가끔 아이들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여행지에서 본 미술관이나 박물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기억에 없단다. 잠시 허탈하다. 구체적으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면 그제야 조금씩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하지만 억지로 강요하는 순간 그나마 작은 불씨로 살아있는 호기심마저 사라지게 한다.
배움은 자발성이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자녀들이 배우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근데 이게 보통 어렵지 않다. 부모는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 개입하려는 순간 호기심의 새싹은 죽어버린다. 배움은 나 스스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다. 몸으로 느끼는 과정이 없으면 자기 것이 되지 않고 그냥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사라진다. 배움은 내가 잘하는 분야와 못하는 것을 스스로 분간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다. 스포츠나 예술이나 공부이건 모든 배움의 과정은 한결 같이 동일하다.
자기 결정권이다.
나 역시 테니스와 수영을 배우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대학원 시절, 공부하기가 힘들 때 스트레스를 해소할 생각으로 테니스를 배웠다. 코치한테 배우지 않고 그냥 학과 동료들과 늦은 밤 연구실에서 나와 10시경에 시작하여 12시까지 즐기곤 했다. 경기를 하면서 혼자 고치면서 터득하고 배웠다. 수영도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필요에 의해서 배웠지만 좋은 스승이 없으니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않았다. 그때는 스트레스를 푼다는 느낌으로 했지만 내 마음대로 몸동작을 통제할 수 없으니 높은 수준으로 즐길 수는 없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한다 “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즐기는 것도 여러 수준이 있다. 가끔 수영이나 골프 코치한테 ‘원 포인트’ 레슨을 받으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설명을 들으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진정 몸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나는 여행>에서는 조금은 다른 의미이지만 다음과 같이 그 어려움을 표현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30센티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는데 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영도 혼자 배웠다.
몇 년 전부터 유튜브에 최상급 수준의 코치가 하는 강의를 들으면서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내 모습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내가 수영을 잘하는 줄만 알았다. 25미터 레인을 왕복 20번까지도 쉬지 않고 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영의 가장 기본 동작인 ‘스트로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무언가 양팔의 리듬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아내에게 수영장 위층 난간에서 보고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벌써 코치에게 제대로 배웠다. 아내가 관찰한 후에 “당신의 문제점은...”이라고 말할 때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을 족집게처럼 ‘꼭’ 찍어서 얘기한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아내의 지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는 여행 중에 호텔에 수영장이 있어 큰아이에게 동영상을 찍어 달라고 하여 나의 동작을 살핀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정확히 눈에 보인다.
왼팔과 오른팔의 스트로크가 균형이 맞지 않다. 무엇이 문제라는 사실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되는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알았으면 이제는 고쳐나가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기본에 문제가 있었다. 스트로크 동작 자체가 부드럽지 않았다. 오른팔의 동작에 이상이 있으니 자연히 왼팔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본기로 돌아가야 하였다. 처음 배우던 과정을 다시 돌이켜본다.
수영의 영법에도 정석은 한 가지이지만 나름의 꼼수는 수십 가지가 된다.
제일 처음 과정은 물에서 몸을 뜨게 하는 방법을 배운다. 머리를 물속으로 넣으면 몸이 뜨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음은 숨쉬기 동작이다. ‘음파~’ 동작을 몸에 익히면 숨을 쉬면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는 발차기와 팔로 휘젓는 동작이다. 몸의 균형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는 말로 설명이 어렵다. 직접 물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수영은 몸의 ‘균형과 리듬’을 알면 부드럽게 헤엄을 칠 수 있다. 아니 모든 운동이 ‘균형과 리듬감’을 찾아야 한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으로 터득하고 바른 동작으로 옮기는 과정은 힘들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꼼수로 지름길로 갈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수준에서 머물고 더 이상 발전이 없다.
가끔 사람들은 말한다. “선수로 나갈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애쓰느냐고? 대충 살지 그래..” 나는 그냥 웃고 만다. 그러면 그만큼의 수준까지만 즐길 따름이다. 뭐 그것도 그 사람의 선택이 어쩔 수 없다.
아이들과 가끔 수영장에 가서 그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자연스럽다. 물과 함께 노는 것 같다. 어릴 때 코치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되냐고?” 물었다. “그냥 몸이 그렇게 돼요”라고 한다. 맞다. 몸으로 느껴야 한다.
조금씩 고쳐나가면서 평소 잘하지 못했던 ‘배형과 하프 터닝’까지 뒤늦게 공부했다. 유튜브를 보고 이론서를 읽고 머리로 이해를 해도 몸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결코 터득할 수가 없었다. 배형이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영, 테니스, 골프 등의 스포츠를 배우면서 많은 것을 깨우친다.
공정한 경쟁, 정직성, 지구력, 끈기, 단순함, 자기 정체성까지 훈련할 수 있다. 단체 운동인 경우는 팀 협력, 자기 역할, 반칙에 따른 페널티, 보상의 힘까지 몸으로 경험할 수 있다. 연습을 꾸준히 하면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게을리하였다면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즐거움의 경지까지 오르면 동작이 단순해진다. 군더더기가 없다. 운동의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까지 생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신영복 교수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이라고 고백했다. 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뜻한다.
삶은 배움의 과정이다.
배움은 자발성이다.
오래전 아내와 함께 매주 일요일 오전에 이화여대 신학대학원 교회에 강의를 듣기 참석했다. 이화여대 교목실장이었던 김흥호 교수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신약성경을 강연하였다. 그분은 다석 유영모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성경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의 근원인 유불선을 통해 '나'를 알기 위해 공부했다고 한다. <영원을 사는 사람>에서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행 할 수 있어야 한다. 행할 수 있어야 진짜 안 것이다. 체득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고 행하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아직도 그분의 선한 모습이 눈에 어린다.
체득하는 과정을 운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운동을 하면서 자기 결정과 자기 효능감을 키울 수 있다. 나 스스로 고치려는 노력을 한다. 스포츠를 통해 ‘균형과 리듬감’을 찾아가면서 나의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삶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가는 자기 변화의 과정이 아닌가. 변해야 한다. 다만 가끔은 나처럼 혼자서 먼 길을 20년이나 돌아가면서 길을 헤맬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도 그렇다. 처음에는 테니스를 배울 때와 같이 서투르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몇 자를 쓰고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일단 시작을 하니 ‘글이 글을 부른다’ 사실을 체험했다. 지금도 어색하지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계속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영을 배울 때와 같다.
어느 수준이 되면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그것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자신과의 거리이다. 나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다. 높은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과정이 모든 이와 비슷하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으로 옮길 때만이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가 있다. 이제는 오래 살면 백세 인생이다. 구십 혹은 백세를 산다고 한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인생은 노예의 삶이다. 좋은 삶이란 연극에서 훌륭하게 자기 배역을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알고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그 역할을 충실히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다.
이번 학기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온라인 강의로 마감을 하였다. 온라인으로 실시한 오픈북 기말고사에서 “한 학기 배우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지가 인상적이어서 여기 적는다.
“수업시간에 배운 공학적 이론도 기억에 나지만 나에게 와 닿고 기억에 남았던 내용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내용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특별한 계획 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고 내 주관 없이 남이 하라는 것을 하고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느낀 것은 그동안 이렇게 살아온 것은 나의 게으름, 부족한 자신감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다. 이제부터라도 내 삶의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나만의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고 자신감을 갖고 남의 시선이나 지적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해질 수 있게 자존감을 키워야 하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학생은 머리로 이해하고 수긍을 했다.
실천의 첫 단계인 스스로 납득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긴 여정이 남아있다.
나도 그러하다.
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오늘도 배우고 익힌다. 행복한 삶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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