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나쁜 인사와 유쾌한 인사
몇 달 전, 코로나-19가 잠시 누그러지는 시점에 결혼식 초대를 받았다.
식장 입구에서 황당한 인사를 받아 잠시 당황한 기억이 난다. 주차장이 협소하다고 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서둘러 식장에 도착했다. 벌써 와 있는 친구들이 식장 앞에 모여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과 인사하면서 마지막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 친구가 불쑥 말을 건넨다. “너 어디 아프냐?”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순간 당황했다. 동창이긴 하지만 서로 얼굴만 알고 그동안 왕래가 전혀 없었던 친구다. 당시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내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는가' 생각했다. “나 전혀 괜찮은데..”라고 자리를 비우려는데 또 말을 건넨다. “어디 많이 아픈 것 같은데..?”라고 사뭇 걱정해주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너 역시 환자로 보인다.”라고 대꾸를 하니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그만 한다.
속으로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그렇게 할 말이 없는가 싶었다. 왜 그런 인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친구는 배가 고프다면서 먼저 식당으로 훌쩍 가 버렸다. 황당했다. 그날 내내 ‘내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거울을 다시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였다. "얼굴이 안 좋네, 어디 아파?"라는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한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생각하여 한 말이라면 함께 병원에 따라갈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 한다. 그런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면 섣부른 걱정과 위로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독이 된다.
결혼식이 끝날 무렵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서 식사를 하는데 바로 탁자 한 칸 건너 맞은편에서 그 친구가 혼자 식사를 거의 끝내고 있었다. 피로연 식당에도 거리두기를 하여 유심히 그 친구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세파에 찌든 흔적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 무언가 본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얼굴 표정이 말해주고 있다. 굳이 근황을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속으로 ‘네가 지금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가까운 사이에는 얼굴 표정만 보면 금방 그 사람의 건강과 감정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부부간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섣불리 판단하고 오지랖 넓게 인사해서는 곤란하다. 설사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인사를 할 때도 “요즘 다이어트를 하는구나”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얼굴을 포함하여 신체와 관련된 인사는 긍정적인 것이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고 인사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그냥 “야, 건강해 보인다.”라는 인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자연스레 친근감이 생기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흔하지 않은 모임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 군에서 만난 동기나 선후배는 사회에서 일부러 찾아서 만날 기회가 드물다. 구태여 그 힘든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아픈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군에서 사관후보생 시절에 5개월 동안 훈련소에서 함께 훈련을 받았던 동기들은 사회에서 정기적으로 자주 모인다. 훈련 시절 아침 구보와 행군을 하면서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기에 오히려 기억이 많이 난다.
그 모임에서 골프를 정기적으로 한다. 운동이 끝난 후 식당 룸에 들어서면서 먼저 라운딩을 마치고 앉아 있는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가 반긴다. 일찍이 중국에서 의류사업을 하여 성공한 동기가 말을 건넨다. “재균이는 항상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녀..”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지난번에 운동하고 식사 모임에서 찍은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 주었더니 이 사람이 친구가 맞냐고? 다른 사람보다 젊어 보인다고..” 물었단다. 순간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친구가 약간 오버한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니 그 날 하루 종일 유쾌했다.
그렇구나,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 있다. 호기심이 생겼다. 그 사람은 왜 유독 나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사진을 유심히 다시 보았다. 내가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어릴 적 중고교 시절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찍었는지 내가 보아도 민망할 정도다. 표정에서 그 시절의 감정들이 살아난다. 그 시절에는 즐거운 기억은 별로 없고 ‘갈등과 혼돈’이라는 단어만 떠오른다. 어릴 적의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얼굴 표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난 원래 잘 웃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남자는 울어서는 안 되고 감정을 절제하고 침착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감정을 절제하는 수준을 넘어 나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셀카를 찍어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얼마나 평소에 인상을 쓰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바꾸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밝아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얼굴 표정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일단 웃는 얼굴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무게와 함께 중력의 힘에 의해 입꼬리가 밑으로 하염없이 처진다. 모든 게 심드렁한 표정이 된다. 물론 오래 살다 보니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게 없을 수도 있다. 나름 '득도'를 했다는 사람은 그 얼굴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세치 혀로 천상의 말을 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의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올 때는 속일 수가 없다. 얼굴 표정에 그 사람의 일생이 묻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얼굴에 표정이 없다. 입 꼬리는 점점 내려가면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혹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학내에서도 교수를 대상으로 세미나를 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일단 얼굴에 호기심이 없다. 오늘 강사가 "무슨 소리 하나 내가 한 번 들어줄게"라는 메시지가 얼굴에 드러난다.
감정표현이 익숙하지 않고 웃는데 필요한 얼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결 같이 표정이 없다.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특유한 유교 문화로 인해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거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경박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로 간주되곤 했다. 얼굴 근육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굳어진다. 나 역시 '난 원래 표정이 그래~'라고 넘어갔다. 어느 날 남이 나를 찍은 스냅사진을 보고 화석처럼 굳은 표정을 보고 난 후부터 바꾸려고 노력했다.
웃을 때는 입 꼬리만 올리면 억지로 웃는 티가 난다. 눈이 웃어야 자연스럽다. 눈이 웃으려면 마음으로부터 즐거움이 있어야 눈까지 웃음이 지어진다. 그 즐거웠던 시간을 기억 속에서 소환한다. 동네 뒷산 정상에서 아침 햇빛을 받을 때의 그 순간을 떠 올리면 즐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그 순간을 일부러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면서 미소를 짓게 되고 즐거워진다. 몸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피드백을 하면서 선순환의 흐름을 가져온다. 경험해보니 신기한 일이다.
<행복은 전염된다>의 저자이자 하버드 의대 교수인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는 이런 현상을 "얼굴 피드백 이론"이라고 한다. 얼굴 표정이 자신의 기분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신경 회로가 뇌에서 근육으로 가는 원심성이 아니라 근육에서 뇌로 가는 구심성 경로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얼굴 근육에 미소를 지으면 뇌로 가는 신경회로가 작동하여 실제로 즐거워진다는 뜻이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진다"는 말이다. 심지어 기분이 나쁠 때에도 미소를 지으면 도움이 되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그렇다. 얼굴에 미소만 지어도 효과가 있는데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웃음 치료법’도 있다고 하니 나의 경험이 생짜 근거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글은 오래 남고 전달력과 파급력이 강하다. 더구나 최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그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말은 글과 달리 휘발성이 강해 금방 공기 중에 사라져 버려 본인도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내가 쓴 글에는 항상 책임이 따라온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고 발행하고 나면 더 이상 내 글이 아니다. 그 글에 대한 호불호와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다만 내가 쓴 글은 끝까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내가 쓴 글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살고 있는지 뒤를 돌아본다. 얼굴 표정이 나의 상태를 표현하듯이 글은 끝까지 나의 내면을 추적하여 돌아보게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듯이 글과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혜민스님의 경우처럼 그 사람이 쓴 글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의 진실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조고각하'라는 글이 떠오른다.
우리가 가끔 산사에 가면 법당이나 선방 앞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발을 벗어 놓는 디딤돌 위에 많이 쓰여 있다. 이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은 “자기 발 밑을 비춰 보고 돌이켜 본다”라는 뜻이다.
글쓰기를 통해 '조고각하'를 다시 생각한다.
휘파람도 자주 분다.
흥이 나서 부는 것이 아니라 휘파람을 불면 즐거워진다. 억지라도 웃는 얼굴을 자주 하면 마음도 덩달아 즐겁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 보면 즐겁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인간과 우주가 연결되어 있듯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신과 영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우주와 접속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순간이다.
그 우주와 만나는 한 순간에 짧은 말이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담기면 서로가 기분이 좋다. 가까이 있는 가족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게도 웃는 얼굴로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을 나누자.
본인은 걱정하고 위로해준다고 하는 말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 상했네, 무슨 일 있어?"라는 말보다는
"야 오랜만이다, 전보다 더 멋있어졌는데~"라고 말이다.
<Photo by Reynardo Etenia Wongs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