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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 너무 바빠

나는 왜 항상 시간이 부족할까?

by 엄재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첫인사가 “요즘 바쁘지..?”이다.


예전의 “밥 먹었니?”라는 인사가 바뀌었다. 하나같이 한숨을 쉬면서 “그렇지 뭐~”하고 넘어간다. 만약 “난 시간이 많고 여유가 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무능함 혹은 호사스러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직에서 은퇴한 친구는 ‘나 아직 살아 있어..!’라고 하면서 바쁘게 보이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상도 목격한다. 바쁘게 살지 않으면 낙오자나 패배자가 된 것처럼 보기에 ‘끊임없이 바쁘다”는 것이 미덕이 된 세상이다.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혹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 ‘내가 지금 이렇게 바쁘게 뛰고 있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마치 ‘바쁘고 말겠다는 의무감'처럼 말이다. ‘나는 한가하고 싶은데..’라고 하면서 바쁜 사회적 분위기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외톨이가 되고 만다. 나도 젊은 시절에 가끔 느낀 감정이다. 나의 생각이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불안을 느낀다. 아주 불편한 감정이다. 남과 동질의 감정을 가져야 마음이 편해진다. 일종의 사회적 동질화 현상이 되었다.


왜 이렇게 시간에 쫓기면서 사는가?


최대한 바쁘게 살아야 능력이 있어 보이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휴가를 자주 가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을 회사는 배척한다. 사회 전체가 ‘바쁨 모드’에 갇혀 버렸다. 의사들은 현대인이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바쁜 생활양식을 사회적 병리현상이라고 진단한다. 일종의 ‘일중독’과 비슷하다. 왜 이렇게 바쁜 생활양식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까지 진행되었을까?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일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농부들은 농사가 끝나는 늦은 가을부터 긴 겨울을 넘기는 동안에는 쉼의 시간이 있었다. 양반들은 방에 들어앉아 사서삼경과 주자학을 공부하고 여흥을 즐기며 살았다. 서양의 평민과 귀족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바쁘게 만들었던 기원을 거슬러 가면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 역사에서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일어난 시점부터 이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후인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부터가 아닐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대가 또한 지불해야 했다. 바로 정신적인 문화적인 풍요로움은 사라졌다.


지금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바쁘다.

오늘날의 엘리트 계층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살아간다. 비서가 작성한 스케줄에 의해 분 단위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본인 스스로 한숨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아직도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일수록 ‘숨 쉴 틈도 없이 일하는 경진대회’를 하는 것처럼 살인적인 일정을 관리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도 이제 경진대회에 한몫을 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라는 성경 구절이 자본주의 발달에 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대 자본주의는 “소비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슬로건으로 바뀔 만하다. 한 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하는 광고 카피로 직장인들을 관광지로 가서 소비하도록 유혹했다. 이제는 그런 광고 자체가 필요없게 되었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광고를 한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나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는 누가누가 더 열심히 여행을 했는지 자랑하는 사진들이 올라온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유명한 관광지를 갔다 와서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라고 결심한다. 누가 더 바쁘게 살았는지 경쟁이나 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는 것까지 바쁜 사람이 유능하고, 한가한 사람은 ‘루저’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바쁘지 않으면 게을러 보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회적 규범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노는 것도 자본화할 수 있는 소비 상품이 되었다.

휴가 시간에도 진정한 쉼을 갖기가 어렵다.


시간은 돈이다.


제품을 생산하는데 시간을 측정하고 투입된 비용을 돈으로 계산하면서 시간은 돈이 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공장을 오래 가동할수록 공장주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주어진 시간에 많은 노동력이 더 많은 생산을 하면 시간당 이익이 늘어난다. 그 출발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농작물을 재배하던 농경지가 사라지고 목장이 들어서면서 농부의 일터가 사라졌다. 농부들은 삶을 위해 도시로 몰리면서 공장 노동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일한 만큼의 시간을 계산하여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 이후로 시간이 자본화되면서 우리는 일한 시간에 따라 그 대가를 지급받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나의 시간을 직장에 팔고 그 대가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런데 직장에서 시간을 집까지 끌고 들어온다. 고용주는 직원의 승진과 임금 인상을 무기로 직원들의 충성도를 저울질한다. 회사에서 도태되지 않고 승진하기 위해 가정에 돌아와서도 자발적으로 일하면서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우리의 기업문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상사의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승진이 어렵거나 급여가 삭감되고, 동료와는 게으름으로 협업이 어렵다는 볼멘소리를 듣게 된다. 회사에서 원만하게 지내려면 할 수 없이 나도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산자이면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도 함께 한다. 의료보험과 생활비는 날로 증가하고 아이가 자라면서 교육비는 갈수록 늘고 주거비용 또한 급격하게 치솟는데 소득은 그렇게 단숨에 늘지 않는다. 그 결과 가계부채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부채의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남편과 아내가 함께 일을 하고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소비와 노동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 역시 이러한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저당 잡는 꼴이다.


그렇다고 미래에 행복의 무지개를 잡을 수 있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행복감은 항상 기준점으로 돌아오는 속성이 있다. 행복의 무지개는 잡힐 듯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항상 만족감보다 한 발 앞서간다. 의식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생겨 먹었다. 현생 인류가 진화하면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원시 시대에서 먹잇감을 잡아서 배불리 포식하고 나면 또 힘을 얻어 사냥을 하러 가야 한다. 중간에 만족하여 동굴에서 마냥 쉬고 있으면 그 자손은 모두 굶어 죽고 말 것이다. 항상 행복과 즐거움에 흥겨워 살았다면 인류는 이미 사바나 시대에 종말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신기술 덕분에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바쁨 중독>의 저자 셀레스트 헤들리는 “사람들은 왜 휴식을 취하지 않는가? 열심히 일하는 자체가 성공의 열쇠라고 믿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정신없이 일하면서 몸을 혹사시키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자본가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의 효율성과 이익을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는다. 일에 대한 습관과 직장 문화로 인해 스스로가 ‘바쁨의 노예 생활’을 자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 외환위기와 미국의 금융위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두 명이 하는 직무를 한 명으로 줄였다. 비정규직을 늘리고 정규직은 계속 줄였다. 자본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더 많이 일해야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다는 개념도 터득했다. 유튜브에서는 멋진 집에서 사는 사람을 내세우면서 구독자를 유혹하고 광고업계는 매년 럭셔리한 차를 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고 싶게 한다. 그렇게 소비를 하려면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예전처럼 남편 혼자 일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함께 일을 한다고 구매력이 갑자기 오르지도 않는다. 그에 따른 비용도 들기 때문이다. 국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집에서 가사를 전담하는 여성들도 워킹맘으로 끌어들였다. 워킹맘은 육아와 가사 그리고 회사일까지 해야 하는 독박을 쓰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남편들이 조금씩 도와주고는 있지만 자신이 육아와 가사를 ‘함께 책임지는 것’이라고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래된 사회적 관습과 개인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나는 희망을 품는다.

시간을 오로지 나의 온전함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아마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일 것이다. 강력한 자본의 힘에 도전장은 못 내더라도 약간의 어깃장은 부리고 싶다. 자본은 숲을 걸으면서 풀내음을 맡으면서 꽃구경을 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면서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가장 싫어할 것이다. 소비하지 않는 사람은 국가경제를 성장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잉여 인간’이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느라 소비할 시간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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