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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길목에 서서

다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by 엄재균

웹툰이 원작인 <며느라기>를 드라마로 제작하여 카카오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며느리가 ‘시월드’에서 겪는 갖가지 불평등한 상황을 현실감 있게 그린 드라마다. 갓 결혼한 여주인공 민사린을 통해 가정에서 가부장 제도가 어떤 모습으로 작동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내가 살아왔던 기억이 드라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며느라기>는 아직 현재 진행형의 육아, 가사와 워킹맘에 대한 불평등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육아와 가사에 대해 남편과 아내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무엇일까?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브릿지 슐터가 쓴 <타임 푸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은 장보기, 요리 등 자신이 좋아하는 집안일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여자들은 끊임없이 일하고, 가사도 끝까지 해야 한다.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노르웨이에서 엄마들이 육아에 쓰는 시간과 아빠들이 육아에 쓰는 시간의 비율을 2:1 정도이고 남아공화국에서는 10:1에 가깝다. 일본과 한국의 남자들이 집안일에 쓰는 시간은 하루 1시간 미만이다.”라고 한다.


현실과 맞는 얘기다. 우리는 얼마나 될까? 신세대 부부들은 조금 나아졌겠지만 남아공화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그 한 시간도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면서 도와주다가’ 아이가 피곤하고 잠들려고 하면 그다음은 아내의 몫이 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아빠들은 가사와 육아를 책임을 진다기보다 잠시 위탁을 받았다가 언제든지 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이 날 때 도와준다는 자세와 내가 책임을 지고 육아를 하겠다는 마음가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높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여성은 직장에서 아이들 생각하고, 집에서는 아이를 돌보면서 직장 일을 하다 보니 ‘멀티태스킹’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뿐이다.


남성들이 직장에서 일만 집중할 수 있고 그나마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집과 직장에서 아내가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역할을 나누어 책임을 함께 가져야 한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오래 세월 속에서 문화로 자리 잡혀 몸으로 체득되었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우리의 후손인 아들과 딸들이 살아갈 시대의 부부의 평안을 위해 더욱 필요하다.


“육아와 가사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책임을 지는 것”
이라는 사실이다.


남편들의 육아와 가사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제도가 개선되는 것 또한 시급하다. 스웨덴의 육아정책을 살펴보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스웨덴에서 아기를 낳으면 부모는 480일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1991년 '육아휴직 남성 할당제'를 도입하여 아빠도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현재 남성들은 평균 100일 이상 육아 휴직을 사용한다. 만약 아빠가 사용하지 않으면 유급휴직은 그냥 허공으로 날라 가기 때문에 모든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있다. 스웨덴의 출산율은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1.9 퍼센터가 되는 이유이다.


스톡홀름에서 국제회의가 열려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중에도 시내 공원과 카페에서 아빠가 유모차를 끌고 아이를 돌보는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이런 합리적인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2020년 기준으로 0.8퍼센트로 떨어질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자체에서 돈으로 지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우리도 남성 육아휴직 할당제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다. 제도개선과 함께 사회적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내의 육아와 가사 및 직장일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시간이다.


나 역시 고백할 것이 있다.

젊은 시절, 밖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 집에 오는 경우가 있다. 몸과 마음이 다 피곤하니 얼굴은 자연히 찌푸리게 된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방에는 이리저리 빨랫감이 쌓여 있고 정리가 되어 있으면 왠지 짜증부터 난다. 그러다 다른 일로 인해 결국은 아내와 갈등을 빚는다. 눈에 드러나지도 않는 가사를 매일 끝도 없이 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내가 정말 알아야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저자 로버트 풀검은 책에서 대학이 아니라 유치원에서 배워야 할 16가지 리스트를 제시하였다. 그중에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깨끗이 치워라”라는 문구가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린다. 왜 이런 작지만 중요한 것을 하지 못할까?


우리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도 어릴 때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된다”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다시 <며느라기> 드라마로 가보자.

추석 전날, 제사를 준비하는 아내를 도와주기 위해 남편이 부엌에 들어가자 시어머니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면서 “남자가 뭘 한다고 부엌에 들어와?”라고 힐난한다. ‘지금도 이런 시어머니가 있을까?’ 싶지만 수많은 ‘살아있는 며느리’의 공감 댓글에서 지금도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다음 댓글이 마음에 쓰인다.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결국은 남자들의 이기심에 내몰린 피해자들일뿐 인걸요. 시어머니 며느리끼리 감정 쌓지 말고 남자들도 함께할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듯.” 맞다.


드라마 속에서도 남편이 우유부단한 점도 있지만 결국은 시부모와 남편이 함께 변해야 한다. 아니 사회 전체 구성원이 모두 생각이 바뀌고 행동에 변화가 와야 한다. 직장 상사는 남자 직원이 출산 및 육아휴직을 아무런 편견 없이 쓸 수 있도록 하고 동료직원도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아니다. 조직의 인사를 기획할 때 모든 가능한 휴직을 고려하여 인사기획을 해야 가능하다.


너무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출발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이기심의 출발점을 찾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 소설이다. 물론 웹툰도 좋다. 소설과 만화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 속에 잠깐이나마 들어가서 주인공의 입장에 서 있으면 상대방을 공감할 수 있다.


몇 년 전 <82년생 김지영> 소설을 보고 난 다음에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영화가 상연된 후 남자들의 갑론을박을 보고 한번 더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가부장제’를 대물림받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구제불능자가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읽었다.

작가의 지난했던 일생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의 그 억척스러움과 함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가슴이 아리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지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다. 어느 역사책이 한 시대의 아픔을 이렇게 선명하게 전할 수 있을까? 그 시대만이 가지는 슬픔과 시대의 변화를 소설로 표현했다. 문학만이 가지는 힘이다.


우리는 또 한 번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헤매고 있다.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지금 이러한 현상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은 내 몸 하나 편하려고 하는 이기주의가 원인이다. 그런 습관이 자자손손 대물림된다. 내 딸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내던져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부가 행복하면 자녀 또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딸 바보, 아들 바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부 관계다. 부부가 의식이 깨어 있고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도 자연히 그 모습을 따라간다.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 부부가 갈등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나면 어떤 양육 방책도 아이에게 소용이 없다. 특히 성장하는 자녀에게는 인격을 존중하고 지켜 봐 주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 세대는 “아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낫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낫다”라는 공자의 말까지 들먹이면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라고 부추겼다.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 입 악물고? 실제로 그런 허망한 유혹 속에서 살아왔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사회에 첫 진출한 40대는 “피할 수 없으면 견뎌라”라는 구호에 살아남기 위해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지금 20~30대는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라는 말에 공감을 더 느낀다고 한다. 이런 깜찍한 표현이 있는가. 삶을 즐길 줄 모르고 너무 힘들게만 살아온 부모세대를 보면서 느낀 감정일 게다. 공감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당연히 생각도 변하고 모든 게 바뀐다. 성역할에 대한 감수성 또한 변한다. 입장을 바꾸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우리 딸 아들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 더 즐기면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런 세상이 되길 희망한다. 세상이 변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게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



[Photo by Artem Knia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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