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일상의 단조로움에 지칠 때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혼자 길을 나선다.
여수 앞바다에 있는 금오도 비렁길을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가파른 절벽 너머로 여수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코스 몇 개를 하루 종일 걸었다. 혼자서 걸으면 상대방과 걸음을 맞출 필요 없이 말하지 않고 나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을 수 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오로지 나의 숨소리, 빗방울 소리, 파도소리, 일렁이는 바람소리만 들리는 그 순간이 좋다. 산등성을 오르면서 거친 호흡을 내쉴 때면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신 에너지로는 살아 있음에 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지만 오로지 몸의 체험으로만 가능하다. 몸을 움직이면 정신도 함께 깨인다.
걷기는 혼자이어야 한다.
혼자 걷는 동안은 명상의 시간이다. 나의 오감을 예민하게 연다. 숲 속의 고요한 침묵 속에서 걷는다.
걷기의 침묵 속에서는 말이 필요가 없다. 혼자 걷다 보면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본질적인 질문이 떠 오른다. 내가 지금 ‘생의 어디 즈음 와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답은 없다. 혼자 걸으면 자연과 어울리면서 생각이 맑아진다. 그리고 고즈넉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동백꽃 터널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꽃을 살핀다. 꽃송이채로 떨어진 동백을 보고 있으면 애잔한 느낌이 든다. 해가 기울고 어스름해지면서 근처 식당을 찾는다. 낯선 식당에 호기심을 갖고 문을 드르럭 연다. 섬마을 식당의 생경한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식당 입구에 있는 야외 탁자에 자리를 잡는다. 곧이어 게장 반찬과 싱싱한 활어가 풍성하게 차려진 한 상차림을 보고 낯선 곳에서 혼자 감동을 먹는다.
낯선 곳을 걸으면 모든 게 새롭다.
그 낯섦이 좋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걷는 게 좋을까?
최근에 책을 보다가 알게 된 <위대한 춤 : 어느 사냥꾼의 이야기, The Great Dance - Hunter’s Story>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보츠와나의 칼리하리 사막에서 랑웨인이라는 사냥꾼이 섭씨 50도의 뙤약볕에서 영양을 쫓아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다. 그는 달리기 우승 메달을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달리고 있다. 2만 년의 역사를 거쳐 원시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부족이다.
사냥꾼은 몇 시간을 사냥감을 따라 간 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지쳐 있는 영양의 가슴을 향해 창을 꽂는다. 그 순간 영양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체념한 눈빛이다. 그 눈빛이 마음에 아린다. 영양은 쓰러지고 현장에서 바로 살점을 도려내어 조각을 만들어 어깨에 이고 부족으로 돌아간다. 부족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은 먹이를 보고 환호를 하고 불을 피우고 함께 춤을 춘다.
나의 원시 조상을 본 듯하였다.
내 안에도 저 유전자가 있으리라.
자신과 부족의 생존을 위해 집요하게 영양을 추적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걷고 달리는 것이 생존을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인간의 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되어 이어오고 있었다.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움직임이 이제는 취미활동이 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동안 직립 보행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최근 100년도 안 된 세월을 거치면서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차의 발달로 걷지 않고도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면서 먼 길을 이동할 수도 있다.
걷고 달리고 헤엄치는 것은 인류가 생존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어졌다. 어릴 때 시냇가에서 멱을 감던 사람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수영장이나 여름철 해변가 이외에는 보기가 어렵다. 오늘날 일터로 가기 위해 발로 걸어가는 사람은 갈수록 드물다.
운동부족과 함께 과잉섭취로 인해 만병의 근원인 비만과 당뇨 환자만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육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얻은 질병이다. 움직이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면 병적인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업자득이다.
걸으면 정신은 긴장에서 벗어나 휴식을 갖는다. 타인에 대한 원망과 불만도 함께 사라지고 연민의 정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른다. 그 연민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나를 향하여 나를 사랑하게 된다.
걷기는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 온몸으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전면적인 방법이다. 숲길을 걸으면서 숨을 가다듬고 온 몸의 감각을 열어놓는다.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압력과 다리를 내딛을 때의 힘과 호흡의 리듬을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걷기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장애물이 되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면서 정신 에너지만 소모하고 있다. 이제는 취미로 걷고 달리거나 운동선수가 아니면 육체 에너지를 사용할 기회조차 없어지고 있다.
걷는 것이 스포츠는 아니지만 ‘트레킹’이라는 이름을 붙여 각종 경량의 신발, 다용도 배낭, 기능성 바지를 만들어 브랜드와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그나마 트레킹과 만보 걷기가 유행이 되어 다행이다. 걷기에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몇 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기록은 의미가 없다. 남과 비교하여 경쟁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 혼자 걷고 즐기면 된다. 걸으면서 아름다운 꽃을 보고 호수를 만났고 숲 속을 지나면서 향기로운 풀내음을 맡았는지 얘기할 수는 있다.
여행을 가도 걸어야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고생하고 돈 쓰면서 여행을 왜 가느냐”라고 물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된다고 했다. 농담이라 생각하지만 순간 어이가 없었다. 물론 집 소파에서 편하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면서 가지 못한 오지도 볼 수 있어 좋긴 하다. 하지만 직접 현지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색다른 경험과 낯선 풍경, 바람의 냄새, 내리쬐는 햇빛의 따스함을 느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내 발로 걷기 않으면 그 공간과 시간 그리고 미지에 대한 설렘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지금 코로나 19로 인해 여행을 떠나기는 언감생심이다.
대신에 동네 뒷산이나 탄천변을 혼자 걸어보자.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걸으면 정신이 버쩍 든다. 그래도 걷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힌다.
걸으면서 생각하면 어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자연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몸의 흔들림에 맞추어 발의 리듬으로 생각들이 솟아오른다.
걸으면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걷는다.
느린 속도로 걸으며 사유하면 삶의 속도 또한 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