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파더>를 본 후
삶에 대한 공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병으로 인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또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특히 배우자의 죽음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겪는다. 모두 상실로 인한 고통이다. 평소에 내가 지니고 사용하던 만년필을 잃어버려도 허전하고 안타까운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감히 모를 일이다.
육체적인 병으로 인해 고통으로 신음할 때도 있다.
나는 사춘기가 끝날 무렵, 대입 준비를 해야 할 고등학교 시절에 중증 폐결핵을 앓았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이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당시에는 항생제가 그리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약이 듣지 않으면서 몸이 스스로 회복하지 않으면 중증 폐결핵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죽음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내 곁에 있었다. 그 상흔은 꽤 오래갔고 내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지금도 가끔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그 당시에 느꼈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면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는다. 지금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육체적인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치매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인식도 함께 사라지는 끔찍한 사건이다.
약 20년 전이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아버지께서 왜 돌봄 아줌마에게 자꾸 불같이 화를 내시는지. 그리고 본인의 지갑에서 아줌마가 돈을 훔쳐갔다고 왜 의심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내가 아버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어렵게 대학병원에 모시고 갔다. 치매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 댁에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증세가 악화되는 상황도 아내로부터 들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치매로 인해 겪었을 황당함과 고통을 최근에 개봉한 영화 <더 파더>를 보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치매를 다룬 영화 중에서 <스틸 엘리스>를 본 후로는 가장 감동적이었다. 물론 연출도 좋았지만 주연으로 나온 앤서니 홉킨스 연기 또한 훌륭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의 시선으로 카메라 앵글을 맞추었기 때문에 내가 마치 치매환자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혼란과 당혹감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영화는 과거의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상황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 영화는 치매환자의 시선에서 가감 없이 그 증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면마다 치매라는 병의 잔혹함을 다시 무겁게 느낀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아버지가 생각났다.
당시에 그래서 그러셨구나. 아버지께서 겪었을 고통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주인공 앤서니는 평소에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상실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아파트, 딸에 대한 기억,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에 집착하고 그 기억 상실을 부정한다. 기억의 혼란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까지 앗아간다. 앤서니가 기억의 혼란 속에 빠지는 장면을 보면서 똑같은 증상을 보였던 아버지는 그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감정이입이 되면서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정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의 그 황망한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에서 앤서니는 결국 모든 과거의 기억이 헝클어지면서 어린아이로 다시 돌아간다. 증세가 악화되면서 내면에 있는 어린애가 드러난다. 마침내 어린애처럼 고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는 장면에서는 감정이입에 되면서 내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괴로웠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병원에 와서 날 집으로 데려 달라”라고 어린아이처럼 흐느낀다. “평생을 집 문제로 고민했는데 이젠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없어”라는 장면에서는 눈이 찡해온다. 앤서니의 무너져 내리는 기억력과 함께 한 인간이 무너지는 장면이 두려웠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렸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배가 얼마 전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다가 자신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이 담담하게 얘기한다. 아직 치매에 걸릴 정도의 나이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발성 치매도 있다는 사실을 <스틸 앨리스>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일단 약 잘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 외에 어떤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사실 나 역시 가끔은 어제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점심을 먹었는지 기억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것이 치매 증세가 아닌가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물론 간단하게 자가 진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중앙치매센터” 홈페이지에 있다. 체크리스트에 따라 응답을 하면 1~14점까지 점수가 나온다. 1~5점까지는 운동과 외부활동을 꾸준히 하고 6~14점은 가까운 보건소나 치매안전센터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권고가 나온다. 질문 자체가 너무 주관적이라 어설퍼 보였지만 간단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결과를 보고 안심은 되었다.
전문가에 의하면 중요한 판단 기준은 자신이 현재 놓인 시간과 공간 감각과 주위 사람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오늘은 몇 월 며칠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병의 증세가 워낙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초기에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현대의학은 그 증세를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치료제를 개발하지는 못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20년 자료에 의하면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치매환자가 4배 이상 늘어 약 80만 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고서가 있다. 이 악화되는 상황이 우리가 장수를 누리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굿 윌 헌팅>으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받은 로빈 윌리엄스도 루이소체 치매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근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부인인 영화배우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치매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다.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일단 나타나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기억을 서서히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가고,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가장 큰 아픔을 준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마저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