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 아직 산속에는 겨울 뒷자락이 남아 있어 황량함과 함께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저 멀리서 분홍색 진달래 꽃망울이 보인다. 갑자기 숲 속의 찬 기운이 따스하게 느껴지면서 봄이 왔구나. 마음속으로 감탄한다. 세상 만물이 다시 생명을 얻으면서 살아 숨 쉬는 부활의 시간이다.
가까이 가서 가만히 진달래를 들여다본다. 아직 꽃망울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가지 끝에는 연초록 새순의 기운이 올라오면서 그 속에는 생명의 에너지를 흠뻑 담고 있다. 죽은 것 같은 단단한 가지에서 생명이 다시 숨을 쉬고 있다. 놀랍다. 아직은 꽃샘추위로 꽃망울을 터트리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움츠려있다. 새순 속에서는 지난 추운 겨울의 눈보라를 견디고 이렇게 다시 살아나려고 용트림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틀 만에 다시 찾은 산에는 분홍색의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려 여기저기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다. 대추 한 알에 태풍, 천둥, 번개 몇 개가 숨어 있었듯이 진달래도 저 꽃을 피우기 위해 지난겨울의 추위와 눈보라를 견디었을 것이다. 곧이어 목련, 산수유, 개나리, 벚꽃, 철쭉과 함께 라일락 꽃 향기를 맡을 수 있겠지. 올해는 이상 기온으로 인해 순서와 관계없이 한 순간에 모든 새 생명의 꽃이 올라왔다. 덕분에 푸르른 봄날의 꽃들과 그 향기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었다.
생명이 다시 시작하는 봄을 수없이 지나쳤건만 올해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꽃들이 자꾸 내 눈에 밟힌다.
'무슨 꽃일까' 궁금해서 다가서 자세히 본다.
이쁘다. 이름이 뭘까, 궁금하다.
꽃 검색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다. 간혹 재미있는 이름도 있다. 노란 나비가 풀잎에 살짝 앉은 것 같은 꽃이 ‘애기똥풀’이라니. 귀여운 이름이다. 줄기를 자르면 노란 액체가 뭉쳐 있는 것이 마치 아기의 노란 똥처럼 보인다고 붙인 이름이다. 이름을 알고 나니 꽃이 다시 보인다.
사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이렇게 의미가 달라지는구나. 그냥 길에 피어난 들꽃이 ‘애기똥풀’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수업시간에 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질문을 던지면 반응이 남 다르다. 표정이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어느 학생은 나중에 메일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어 놀라웠고 고맙다’라고 자신의 감정을 전한다.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져서 어렵지만 가능한 ‘학생’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기보다는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도록 노력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나 역시 회의에 참석할 때 회의 진행자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남다른 호감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오늘도 개천 길을 따라 걸으면 하늘색의 짙은 줄무늬가 있는 작은 꽃들이 양지바른 곳에 '나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피어 있다. 긴 겨울을 견디고 봄을 알리는 파란 하늘색의 꽃이다. 검색을 하니 이름이 ‘개불알풀’이다. 재미있다.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원래 일본에서 개 불알을 닮은 작은 열매가 달리기 때문에 붙인 이름을 한글로 직역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니까 진짜 닮았다. 최근에는 꽃의 아름다움과 맞지 않아 ‘봄까치꽃’으로 부르기로 하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꽃 검색에는 ‘개불알풀’로 나온다. 난 오히려 더 정겨운 느낌이 든다. 조금 더 큰 것은 ‘큰 개불알풀’, 줄기가 곧추서 있는 것은 ‘선 개불알풀’이다. 유럽이 원산지이고, 꽃 수술 2개가 검은색으로 생겨 ‘새의 눈’처럼 보인다고 하여 서양에서는 ‘새의 눈- Bird’s Eye”이라고 불린다.
흥미롭다
나뭇가지에서 처음 올라오는 연초록의 새순과 꽃망울을 살짝 만져본다. 문득 갖난 아이의 통실하고 부드러운 발바닥이 떠 오른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백일 즈음에 아이 발을 만지면서 감탄한 기억이 난다. 어떻게 이렇게 보드라울 수가 있을까? 아이는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탐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다. 온갖 질문을 쏟아낸다.
하지만 우리는 자랄수록 발바닥이 거칠고 딱딱해진다. 마음도 함께 경직되어 간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호기심은 사라지고 세상의 이치를 다 알았다고 자만하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이념과 편견에 빠져 내 생각만 옳고 진리라고 떠들어댄다.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자유로움을 서서히 잃어간다. 생명의 흐름에 역행하는 허망한 욕망에 마음이 흩어지다가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면서 육신도 함께 흩어진다.
자연의 시간은 거스를 수가 없다.
이 생명의 흐름이 수천 년 아니 수억만 년 전부터 끊임없이 순환되고 한 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다.
사람도 이 생명의 흐름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봄을 맞아 새 생명을 얻어 유년기를 보내고 에너지가 넘치는 청년기를 거쳐 삶의 의미를 찾는 중년의 가을을 거친다. 나 자신도 지금 이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다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봄을 위하여 노년은 겨울을 맞는다.
인간 역시 죽지 않으면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 운명이다. 모든 생명은 이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 생명의 문이 다시 열리는 봄의 시간이 지나고 활기찬 에너지가 진동하는 여름을 맞이할 것이다. 나뭇잎은 진초록으로 변하겠지. 며칠 전, 산속으로 올라가니 벌써 잎새가 모두 초록으로 확 바뀌었다. 얼마나 생명이 빨리 자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서정주 시인이 노래한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도 찾아올 것이다. 강한 추위와 함께 눈이 내리는 기나긴 겨울이 오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꽃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산에서 내려와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산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꽃 검색을 하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