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4단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우리만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황상태이다.
뉴욕타임즈는 매일 전 세계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인터넷판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 날짜로 확진자 수를 기준으로 미국은 100,000명당 47명, 일본은 18명, 한국은 2.7명으로 확인된다. 우리보다 인구가 약간 많은 프랑스를 보면 28명이며 매일 평균 18,600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한국은 그나마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으로 통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망자 수를 비교해도 일본은 지금까지 15,900명, 우리는 2,276명으로 전체 인구수로 비교해도 양호한 수치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지만 아직 백신 접종률이 낮아서 안심할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신종 바이러스는 초고속으로 전 세계로 퍼졌다.
코로나 델타 변이는 원래 인도에서 발견된 것인데 말 그대로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그나마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으로 어렵게 통제되고 있는 상황을 다시 뒤집어 놓았다.
우리는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초고속 시대를 살고 있다.
5G에 초당 기가바이트 속도로 데이터를 모바일 단말에 전송한다. 우리는 첨단의 기술 트렌드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구글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사용자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하는 장소로 한국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이유다. 이렇게 빠르고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일상의 삶에서 행복을 가져다줄까?
초고속 열차를 이용하면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하여 아주 편리하다. 가끔은 뭔가를 잃어버린 느낌도 든다. 오랜만에 창밖 경치를 구경하려면 지하터널로 들어가 버린다. 여행의 운치를 느낄 겨를도 없다. 식당칸에서 느긋하게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창밖에 눈 내리는 경치도 음미할 수 없다. 맞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빠른 속도감에 효율성을 실감할 때 분명히 또 다른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초고속의 속도만큼이나 개인의 욕망도 덩달아 빨라지고 거칠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보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눈을 씻어 보아도 없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모두 영상물이다. 동영상의 이미지가 빠르게 흐르는 화면을 보면서 사람들의 성정은 갈수록 거칠어진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범죄 소식이 자주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의 흐름을 정지시켜버렸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가장 속도가 빠른 하늘 길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삶의 속도를 한꺼번에 멈추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시간에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온라인 강의를 통해 학생과 교수는 집에서 강의하고 수강하였다. 평소에 불가능해 보였던 재택근무와 비대면 강의가 일 년 넘게 진행되고 있다.
세상이 갑자기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강의하고 근무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어색했다.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습관을 들이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은 그럭저럭 또 적응을 하면서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책을 보는 사람을 발견했다. 이 바쁜 세상에 한가하게 지하철에서 책이나 볼 시간이 있구나. 맞다.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일수록 가끔은 지하철에서도 책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속도에 휩쓸려 급류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다.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려면.
낮에도 아이들과 함께 공원을 찾는 젊은 부부들이 많다. 다들 한가로이 걷는다. 오히려 전화위복이다. 산책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한가로움을 누리자. 느리게 걷는 만큼 안 보였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복잡하게 엉클어졌던 머릿속이 하나씩 정리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남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고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 메아리를 지르더라도 부러워할 것 없다. 바쁘고 빠르게 달린다고 따라 할 필요 없다. 나만의 속도로 자신의 욕망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높이면 된다.
우리는 나름대로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직업을 선택하고 직장에도 열심히 다니면서 내 마음껏 먹고 마시고 행동할 수 있다. 그것 만으로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나 역시 ‘남부럽지 않게 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남의 시선이 중요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국 박사학위를 받아도 기쁨은 그 순간뿐이었다. 다음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명예보다 돈이 우선이었다. 다들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그것을 숭배하고 있다. 너도나도. 기업에서 밤낮으로 일하여 직급도 올라가고 돈도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가 쏠쏠했다.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사라졌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상층부 사다리로 올라가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다. 결국 올라는 갔다. 아침이면 일찍 조찬모임에 가서 강의도 듣고 창투업계 리더도 만나면서 바쁘게 지냈다. 젊은 나이에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타고 동창 모임에 가면 다들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았다. 근데 그 사다리의 꼭대기는 끝이 없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건 내가 바라는 삶은 아닌데?’라는 후회는 하지 않았던가. 행복을 느낄 시간조차도 없다. 주말마저도 남이 정한 스케줄에 이끌려 골프장으로 단체 산행으로 멍에를 진 소처럼 이끌려 다니지는 않았는가? 욕망은 통제되지 않았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시간까지도 남에게 헌납했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사다리에 높이 올라갈수록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다. 시간이 줄어들면서 마음까지 조급하고 여유가 없었다. 내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는 직원을 다그쳤다. 제대로 갑질을 한 것이다.
결국은 한방에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마흔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IMF 환율위기를 겪었다. 모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바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갑자기 맨바닥으로 ‘꽝’ 떨어졌다.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하는 고통은 더 컸다. 그 아픔을 잊기 위해 골프와 술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고통은 그대로 차곡차곡 마음 깊은 곳에 쌓여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 부양할 어린 딸과 가족이 있었다. 이 시련을 직면해야 했다.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내 삶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지? 곰곰이 다시 생각한다.
산책을 하면서 지난 과거를 돌이켰다. 내 욕망이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따랐던 것에 불과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머리가 크면서 몸으로 알았다. 돌이켜보니 그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나의 욕망을 한 꺼풀 벗겨보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부모나 사회가 원했던 것이었다. 타인의 목마른 갈증에 내가 대신 물을 벌컥벌컥 마신 격이다. 그 목마름은 결코 가시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극단의 자본주의를 살고 있다. 사회적 계층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올라가기도 어렵고 한번 추락하면 회복할 길이 없다. 패자 부활전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돈, 학벌, 외모, 직업, 지위, 직장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게 일렬로 수직적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일등부터 꼴찌까지 피라미드 구조처럼 말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일등은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등은 일등을 따라잡기 위해.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은 더 넓은 집에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많이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항상 타인과 비교하여 경쟁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간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해 늘 초조하고 불행하다. 이런 구조는 어릴 때 교실에서 이미 학습하여 내재화되어 있다.
내 기억에도 중학교부터 반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순서대로 반을 편성했다. 한 반에 누가 일등이고 꼴등인지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아예 특설반을 만들고 한 반에 좌석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순서대로 배치했다. 일등 옆에는 꼴찌를 앉혔다. 옆에 잘하는 친구를 보고 배우라는 심오한 교육적 배려와 함께. 이게 우리 삶의 본질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습하여 내면화되어 무의식 속에 들어앉아 있다. 수직적 서열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안다. 모두가 블행한 사회를 만들었다. 서열 숭배 사회이다.
나 역시 사다리 높이 올라가면 돈을 벌면 사회적인 명예를 가지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 피라미드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사다리에서 내려오려면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돈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시간과 돈을 노동시장에서 서로 교환해 버렸다.
돈을 많이 받을수록 내 시간을 그만큼 반납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고맙게도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이면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즐겁고 의미도 있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늘어지고 권태에 빠지기 쉽다. 권태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해 마약과 도박에 빠지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일 중독, 운동 중독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뇌에서 도파민 호르몬이 나오면 순간적으로 쾌락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권태에 빠진다. 무한반복이다. 결국에는 절망으로 치닫는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몇 년 전부터 산책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집중하는 즐거움을 찾았다. 나만의 방식이다. 글 쓰는 동안에는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내 감정과 느낌을 글로 표현하면서 나를 조금씩 알아간다. 나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나의 욕망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글을 쓰면 질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삶은 고통이다. 그 고통속에서 조금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행복을 쫓는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공존을 하던 그렇지 않던 이 사태도 조금씩 우리 시야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코로나19 이전에 우리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지금까지 미루었던 해외여행을 하고 보복 소비를 하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욕망은 과연 나의 욕망일까?
이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면서 다시 생각한다.
가족과 친구와 떨어져 있으면서 더욱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늘 존재의 부재를 통해서만이 그 귀중함을 느낀다. 사회적 거리를 두면서 나 자신과도 거리를 둔다. 나와의 심리적 거리다. 나를 다시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 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한다.
삶은 유한하다.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아무도 모른다.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귀중한 시간을 남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돌이킨다. 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남에게 반납하면서 자발적으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가끔은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삶의 속도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Photo by Matt Seymou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