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어?”
“내 인생만 고통이고 아픈 것 같지만 다 아픈 인생이야” 한때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누나> 프로그램에서 윤여정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누구나 태어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 아닌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다 자기 나름의 생의 아픔이 있다. 나 또한 20대 젊을 때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청춘 앓이에 마음이 혼란하고 조급했다. 결혼하면서는 남편으로 사위로 아빠로, 대학원생, 연구원, 회사원, 대표이사, 교수로 살아가는 것도 모두 처음이기에 어설프고 낯설었다. 내 젊음도 기울어 가면서 어느새 중년의 시간이 저만큼 지나간다. 마음의 여유는 생겼지만 대신 몸의 이곳저곳에서 자신을 봐 달라고 아우성이다.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몸은 아프고 덩달아 마음도 외로움을 탄다. 삶은 언제나 낯설고 서툴게 다가온다. 그 삶의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실패와 상실의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도 피할 수 없다. 나 역시 살면서 많이도 넘어졌고 아파했다. 오죽하면 삶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가운데 가끔, 아주 가끔은 기쁨과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사춘기에는 병마에 시달렸다.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고 결국 다시 일어섰다. 고통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움츠러들었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하필 왜 나에게?' 시간은 흘러 회복은 되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남았다. 툴툴 털고 일어났지만 어디로 갈지를 몰랐다. 주위에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사람도 없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찌하다가 다시 군대 병원 침대에 누웠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이번 생은 완전히 망했어' 자책하고 있었다. 이른 봄날이었다. 겨울의 찬기온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따스한 햇살의 기운을 군병실 침상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아직도 그 순간이 기억에 생생히 떠오른다.
‘이렇게 계속 병든 병아리처럼 살아야 하나?’ 혼자서 속으로 탄식했다. 막다른 길이었다. 그동안 무던히도 갖은 핑계를 대면서 피해 다녔다. 내 삶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살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제는 병마에 대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 내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육해공 통합 장교 병실에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삶은 운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헤쳐나가는 것이라 다짐했다. 두려웠지만 선택을 해야 했다. 결국 확실한 보장도 없는 불안한 유학을 결심했다. 집에서도 반응이 "갑자기 안 하던 공부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의아해했다. 난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무작정 그리고 악착같이 밀어붙였다. 홀로 병실에서 준비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결국 입학허가서를 받고 미련 없이 떠났다. 그곳에서 6년간 한 번뿐인 젊음을 실험했고 원하는 학위를 얻었다.
그러나 기쁨은 한순간이었다. 성취에 대한 뿌듯함은 3개월 정도 약효가 있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는 것이 이것이었나?’ 허탈했다. 귀국해서는 또다시 올라갈 계단을 찾았다. 그곳을 오르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어올랐다. 경주마처럼 옆도 보지 않고 코앞에 어른거리는 돈과 명예를 잡기 위해 쫓아갔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살얼음판 위를 달렸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내 앞에 낭떠러지가 보였다.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관성의 법칙에 따라 벼랑으로 떨어졌다. 박살이 났다. 한마디로 한방에 ‘훅~’ 나가떨어졌다. 악몽과도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지난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절벽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산길을 내려왔다면 오를 때는 못 보던 꽃들도 보면서 즐겼을 텐데… 삶이 추락할 때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 허무함을 알코올로 온몸을 적셔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내 몸만 피폐해졌다. 다시 일어나야 했다. 걸음마 아이 때처럼.
내 삶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삶의 의미를 곰곰이 다시 생각할 시간도 없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 좋게도. 학문에 대한 뜻보다는 생계를 위해..
그곳에서 오랜만에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 학생들의 웃음을 보면서 세상의 숨 가쁜 속도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내가 한동안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허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누군인들 녹록지 않은 삶이 있을까?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상사고를 당했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니까 뭔가 보였다. 건강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삶의 본질에 대한 생각이 삶의 고통 속에서만이 생각났다. 이게 다는 아닌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다행히 건강을 다시 회복했다.
삶과 고통 사이에도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선택할 자유는 있다. 어차피 단 한 번뿐인 인생인데 의미 있게 살 수는 없을까? 처음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시간이 흘러 생의 후반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불혹의 나이인 40을 넘길 때는 시간의 흐름에 깜짝 놀랐다. 책을 보면서 글씨가 흐리게 보여 친구가 권해서 돋보기를 쓰니 글이 환하게 보였다. 그 친구는 "너도 이제 노안이 왔다고 활짝 웃었다." 그 친구가 그렇게 밉상으로 보였다. 노안이라... 그동안 천년만년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늙어감'을 처음 실감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의 시간을 넘긴다. 이제는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할 것 같은 삶이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이렇게 무심하게 시간은 흘러가는구나. 스스로 알아채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숨 한번 쉬는 동안에 생은 지나간다. 어느 순간 내 의지와 관계없이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매스컴에서는 백세시대를 떠들어도 실감 나지 않는다. 몸만 백세를 살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삶의 의미를 다시 찾고 싶어 철학과 심리학 책을 찾았다. 특히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의 <인간 이해>와 <삶의 의미>를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를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인생이란 타고난 운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려는 의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삶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 스스로 시간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쁜 삶이 오히려 자랑이었다. 난 이렇게 바쁜 사람이야 라고. 바쁨과 빠름이 내면화되었다. 그 습관을 바꿀 수는 없을까? 시간의 흐름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의식적으로 관찰할 수는 있다. 삶의 속도를 늦추었다.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꽃과 함께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 운동도 달리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스트레칭을 하면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심지어 식사도 천천히 먹으면 그 진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산책하는 시간이 명상하는 시간이다. 내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았다.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지?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오기는 했나? 끝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우린 중세 수도사가 아니기에 천천히 걷고 명상만 하면 지루하기에 중간에 관두기 십상이다. 산을 오르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이 있다. 강렬한 순간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 더 좋다. 힘들기는 했지만 쾌감이 있다. '러너스 하이'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산 정상을 오르면서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그 순간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내 심장이 강하게 펌프질을 하고 허파가 가쁘게 숨을 몰아 쉴 때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호흡을 통해 왕성하게 생명활동을 하는 그 순간의 나를 지켜본다. 호흡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 순간이 가장 기쁘다. 땅을 밟은 발바닥에 올라오는 진동과 나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들려올 때 진정 살아있음을 느낀다.
산을 내려와 호숫가를 천천히 걷는다.
숨을 고르는 고요한 순간이다.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느끼는 관찰의 시간이자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다. 이 시간도 좋다. 걷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 오른다. 생각의 부유물이 가라앉고 맑은 상태가 된다. 걸으면서 들숨과 날숨을 쉴 때면 그동안 억눌러 있던 나의 욕망을 본다. 인정 욕구, 소유에 대한 끝없는 욕망, 돈과 명예에 대한 거친 욕망을 지켜본다. 사회가 투사한 욕망이 내 것인 줄 알고 힘들게 살아왔다. 갈증이 나서 물을 마셨지만 내가 느끼는 갈증이 아니었다. 타인의 갈증이었다. 그러니 내 갈증이 해소될 리가 없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기나 했을까? 남의 인생을 산 것은 아닐까?
내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다시 본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앞으로 추동하는 에너지이고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그 욕망을 떨쳐 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그냥 욕망에 더 솔직하고 싶다. ‘그게 나 구나’라고 혼자 '쯧쯧’하면서 그냥 인정할 따름이다.
‘그게 나야, 뭐 어때!’라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조금은 뻔뻔해지고 싶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 년째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타인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나 자신과 거리 두기가 필요할 때다. 자신과의 심리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본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정리를 하고 싶었다. 지난 3년 동안 거의 매일 걸었다. 책상에서 앉아서 생각만 하지 않고 운동하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 생각을 메모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걷기는 많이 닮았다.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쓴다. 걷고 쓰면서 나를 관찰했다. 걷고 쓰기를 시작하면서 조금 높은 시선에서 나를 볼 수 있었다. 남의 시선과 얘기에 나의 감정이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유체이탈까지는 아니지만 나의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15분간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글 쓰고 나면, 그냥 생각만 할 때와는 달리 글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나와 독자들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했다. 몸을 움직이면서 걷고 근력운동을 하면서 내 몸의 변화를 보았다. 자기 효능감이 높아졌다. 마음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외롭고 마음이 힘들다고 느끼면 밖으로 나간다. 몸을 움직이면 정신이 맑아지면서 마음이 회복된다. 인간의 정신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자기 합리화를 잘한다. 우리 마음은 절대적으로 몸의 지배를 받는다. 건강을 잃어버리면서 인생이 통째로 무너지는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옛말에 틀린 것이 없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너무 흔해 빠진 소리라 흘려버린 말이었다. 언제 ‘훅~’하고 갈지 모르는 나이에는 더더욱 움직여야 한다.
나이에 대해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지혜롭게 행동할 줄 알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고집스럽게 행동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해 봤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다 해본 거야!”
글 쓰면서 예전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돌아보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몸은 굳어지고 마음은 경직된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정을 찾게 된다. 미국의 MIT 교수인 조슈아 하트손의 성인 지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70대까지 학습을 계속한다면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어휘와 문장력은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나를 위한 소리였다. 나를 위하는 것은 결국 아내와 가족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연결고리의 출발점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찌 가족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남이 뭐라고 하든 눈치 보지 않고 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사람들은 결코 남의 인생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인정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당장 해야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 미운 감정, 섭섭함, 후회 등으로 마음이 경직되었다. 이제는 그 짐을 내려놓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아내와 자식들과 소통하고 사랑하면서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 출발점이 걷기와 글쓰기였다.
기억의 흐름에 따라 4개월을 앉아 초고를 썼다. 글을 쓰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고 기쁨이었다. 초고를 쓰고 나면 쉽게 완성될 줄 알았다.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본격적인 글쓰기는 퇴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퇴고를 하는데 무려 3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퇴고 중이다. 퇴고하는 과정에 내 글이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 보이지 않던 글의 민낯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휘력은 빈곤하고 글에는 맥락이 없다. 앞에서 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면서 표현들도 유치 찬란했다. 내 생각이 이렇게 짧은가? 이런 유치한 글을 계속 쓸 수는 있을까? 먹고살기도 바쁜데 계속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글 쓰는 능력이 한심스러웠다. 내 글이 객관적으로 보이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실망이었다.
초고로 쓴 글을 모두 버렸다.
내가 왜 돈도 되지 않는 글을 쓰려고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 지적 허영심에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회의가 들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나를 표현하고 싶고 삶을 한번 정리하고 싶은 그 마음을 다시 되새겼다. 물론 지금까지 쓴 글과 공들인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허영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다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니 구태여 부인하지 않으련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허탈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머리를 굴려서 돈이 되는 쓸데가 있는 일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쓸데없는 일도 좀 하자. 내 가슴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어차피 한 번뿐인 삶인데 일단 저질러 놓고 후회를 하든 말든 하자. 결국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 더 잘 쓰려고 하면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과잉 의도’ 증후군이다. 모든 일에서 잘하려는 생각이 과도하면 오히려 망치게 된다. 노트북을 일단 젖히고 워드 파일을 연다. 글쓰기도 루틴이 필요하다. 하얀 백지 위에 커서가 깜박거리는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순간을 견뎌야 한다.
심호흡을 하고 어깨에 힘을 뺀다. 눈을 감고 호흡을 천천히 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호흡을 가다듬으면 마음도 함께 안정을 찾는다. 신기한 일이었다. 과연 독자들이 읽어 주기나 할까? 이런 고민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깨끗이 잊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만 하자. 그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이 겪은 최근의 경험을 글로 표현하자.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걸으면서 내면의 변화를 글로 쓰자. 내 생각이 씨줄이 되고 경험이 날줄이 되어 삶의 이야기로 엮어 보자.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를 우연히 발견하여 글을 올렸다. 단편의 스토리를 세상에 공개하면 그 글 내용대로 살려는 강한 의욕이 생겼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것이 아니라 “쓰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글의 생명력을 체험했다. 새로운 시도였고 경험이었다. 그 글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 전공에 관한 책은 여러 권 출판했지만 나의 일상과 내면을 드러내는 수필은 처음이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써 내려갔다. 글쓰기 자체가 즐거웠다. 나의 마음을 글로 온전히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또한 처음이라 서툴렀다.
이 책의 목적은 삶을 한 번은 정리하고자 마음에서 출발했다. 글을 쓰면서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딸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픈 기억까지도 모아 생의 일부를 매듭짓고자 한다. 딸들에게 직접 얘기하기는 낯설고 잘못하면 잔소리가 되기 십상이다. 너희들도 나처럼 살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려주고 싶을 따름이다. 나의 삶에서 즐겁고 슬펐던 시간을 잡아 그 순간을 기록으로 묶어 딸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선택은 그들 몫이다.
또 다른 목적은 나를 해명하고 반추하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이야기를 쓰려고 돌아보니 지난 세월이 한 장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스쳐간다. 생의 마지막 시간에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 그 기억 속에서 얽힌 실타래를 더 늦기 전에 풀고 싶었다. 색이 바래고 희미해진 기억을 다시 살리고자 했다. 아파했던 기억 기뻤던 순간을 떠올렸다. 삶의 의미를 찾는 이 시간을 통해 내 생의 운명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돌아보면서 글 쓰는 과정이 아직도 낯설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고 앞으로도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나의 이야기’를 통해 누구를 가르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이만큼 살았네’ 하고 자랑할 생각도 그럴 거리도 없다. 여러분도 일상의 바쁜 시간 속에서도 가끔은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랄 뿐이다. 삶은 아쉽고 힘들지만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 서로 연결되어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사실이다. 이 글 역시 독자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공감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더 나아가 함께 글쓰기를 하면 좋겠다. 독자들도 함께 걷고 쓰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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