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추석을 지나면서 다시 기승을 부린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된 이 팬데믹은 도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 아니 끝이 아니라 '함께하는 코로나19'는 언제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비대면 강의도 계속된다. 개인이나 공동체는 힘들고 고통이 따를 때면 자신의 뒤를 돌아보면서 질문을 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고 반추한다. 내 삶을 돌아본다. 삶에 대한 질문이 없으면 의미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다시 생의 의미를 생각한다. 답은 없겠지만 그래도 찾기라도 노력해보자. 삶을 생각하면 항상 따라오는 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왜 세상에 왔는지도 모르고 이곳에 던져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지 길을 찾다가 결국 헤매면서 이승을 떠난다. 종교적으로 아무리 해석을 잘 하려고 해도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질문이 떠 오른다. 그동안 멀리 아스라이 있는 무지개처럼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성공과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다. 나 스스로 내 욕망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했다. 타인의 욕망을 투사하여 그것이 나의 욕망인 줄 착각하면서 살아왔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에 다가올 불확실함에 불안했다.
그중에 가장 어려웠던 질문이 ‘인간답게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에서 시작하여 그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많았던 질문은 머리가 커지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 어느 순간 멈춘다. 주위 사람들이 질문을 잊은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질문을 잊어버린다. 원래 ‘남들처럼 저렇게 사는 것’이야 속으로 되새기면서 살아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생은 ‘길고 긴 앎의 과정’이라는 사실은 문득 느끼게 된다. 산다는 것은 어제보다는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이 되도록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믿을 뿐이다.
영화 <내 사랑>이 생각난다. Maud Lewis라는 캐나다 여성 화가의 실화를 그린 영화다. 어릴 때 턱의 발달이 멈추면서 성장이 느려지는 장애가 있는 Maud는 숙모 집에 얹혀살았다. 그녀는 외로울 때 그림을 그리면서 살다가 계속되는 숙모의 구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느 날 독립을 결심한다. 혼자 사는 거칠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남자의 가정부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고 틈이 나면 집안의 벽과 창문에 그녀의 감성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그림을 팔면서 형편이 나아지고 결국 둘이는 결혼식까지 올렸다.
죽는 날까지 Maud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에 열정을 담아 매일 그리는 모습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Maud가 급속히 몸이 쇠하면서 병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남편에게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라고 고백하는 얼굴에서 인간의 존엄을 느낄 수 있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품위를 지키면서 ‘사랑했다’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 거기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한다. 죽음을 직면하면서 살아가면 삶이 오히려 더 소중함을 느낄 때가 있다. 현대의학은 중환자를 살리는데 노력을 하였지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지에 선택지에 고민을 하지 않았다. 의학은 인간이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오히려 고통을 더해 주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까.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의미다. 의학적으로 존엄사의 방법은 인공호흡기 등의 장치로 연명하고 있는 회복불능의 환자에게서 장치를 제거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그러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사실 ‘적극적 안락사’라는 선택지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나의 마지막을 지켜볼 아내와 가족에게 미리 부탁한다. 유언장에도 쓰겠지만 나는 가능한 집에서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우리는 네덜란드처럼 집으로 방문하는 홈닥터 제도가 없어 현재로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치료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의미 없이 연장하기 위해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단호하게 거절하길 바란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도 작성했지만 연명치료는 받고 싶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혹시 말기암으로 진단이 나오고 생존율이 희박한 의미 없는 수술은 거절한다. 그런 경우에는 난 지체 없이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길 바란다. 가능한 적절한 진통제를 사용하여 통증과 고통을 줄여 얼마 남지 않는 삶을 평안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그것이 가족을 위하고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 믿는다. 호스피스 입원비와 간병비는 미리 준비해 놓을 테니 입원하도록 하면 좋겠다. 사후에 안구를 기증하길 원하니 내가 의식이 없더라도 가족이 모두 동의해 주길 바란다.
장례식은 오로지 가족과 미리 명단에 있는 아주 가까운 친지만을 초청하여 간소하게 치르길 바란다. 나의 부모님 장례식을 치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정작 고인에 대한 추모와 위로를 함께 할 시간을 놓치기 때문이다. 장례식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면 좋겠다. 포스메가 남성 합장단이 부르는 “본향을 향하네”가 좋겠다. 쇼팽의 녹턴 전곡을 연주한 백건우 앨범을 계속 들려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다. 부고는 장례가 다 끝난 후에 내는 것이 좋겠다. 장례비용은 미리 준비하여 전할테니 부고를 띄울 때 조의금과 근조화는 정중히 사양한다고 전해주라.
생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졌지만 죽음은 최소한 나의 선택에 의한 방식으로 치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삶은 나에게 귀중한 선물이었고 즐겁게 소풍 왔다가 다시 본래의 ‘없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삶은 영겁의 긴 침묵 속에서 잠시 ‘있음’으로 존재하다가 다시 ‘없음’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테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이자 고생물학자가 주장한 궁극에는 오메가 포인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죽음이 있기에 한 번뿐인 지금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내가 없는 그 순간에 가족이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해 준다는 뜻이지만 내가 없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서는 필요하겠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사실 우리의 의식은 매일 죽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 오늘의 나는 밤마다 죽고 내일 아침에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매일 그렇게 다시 태어나 살아갈 기회를 가질 때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살아가자. 사라지고 없을 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통해 깨닫지 않았던가? 지금 살아 있을 때 나의 의지로 주체적으로 살자. 살아있는 이 순간만큼은 아내에게 딸에게 그리고 날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자. 속으로 다짐한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슬퍼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쓸데없이 탐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고
노여워 하지 않고
사랑만 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다가올 미래에 불안할 이유도 없이
지금 주어진 금쪽같은 이 시간
단 한 번뿐인 이 삶을
위해
<Photo by Klemen Vranka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