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당신 걷는 뒷모습이 아버지와 너무 닮았어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데 그게 어디 가겠나~~”라고 대꾸를 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 젊은 생전에 함께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을 본다. 아내의 말처럼 사진 속 아버지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SG워너비의 김진호가 불렀던 <가족사진>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중략>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 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 있네
…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웃음꽃 피우길
피우길…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니 약 25년 전이었을까.
투병 중인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고 홀로 사시는 아버지와 함께 오랜만에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내와 함께 “오늘은 저희가 계산할게요”하면서 식당 계산대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얼굴에 정색을 하시면서 당신이 계산을 하겠다고 나가신다.
“그 월급으로 손주들 제대로 먹이고 키울 수 있냐”
고 말하시면서 살이 빠져 헐렁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계산을 먼저 하고 나가셨다. 아마도 당시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사는 것이었다. 고난과 질곡의 시대를 살아오신 것이다. 아들이 잘 나가는 대기업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있었지만 아버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아들과 손주가 배고프지 않게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를 염려하셨다. '자기 밥그릇은 타고 난다'라는 옛 속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의 삶을 통해 몸으로 아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그 말과 얼굴에 사랑의 감정이 드러나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2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장면이 아직도 내 눈에 밟힌다. 세월은 다시 돌아와 사진 속 젊었던 당신의 그 모습에서 나를 본다. 젊었던 나의 그 시간도 또 그렇게 가을로 넘어가고 이제는 내 자식들이 꽃피는 봄의 시간을 맞이한다.
딸의 결혼식이 지난주에 있었다.
양가 상견례를 하면서 모든 것을 간소하기로 사돈 내외분과 의기투합을 보았다. 예단, 예물, 폐백, 주례 등을 모두 생략하고 예식장 등은 딸과 사위가 서로 상의하여 결정하고 우리는 그 결정에 무조건 동의했다. 상견례를 하는 시간이 한층 기분이 가벼웠고 즐거웠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결혼을 준비하면서 4개월이 흘러 결혼식이 다가왔다. 추석을 보내면서 코로나19가 더 확산돼서 양가 포함하여 49명의 제한된 하객만으로 식을 올리게 되었다.
평소에 작은 결혼식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어쩔수 없이 규모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축하를 하기 위해 오라는 초청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발 오지 말라고 당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단톡방을 통해 멀리서 ‘마음만으로 축복해주세요~”라는 공지에도 불구하고 직접 찾아온 친구들과 하객들에게 답례품으로 대신했지만 식사대접도 할 수 없어 죄송스러웠다. 초청 명단에 없는 하객들은 동선이 차단되어 신랑 신부 얼굴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규모를 줄이니 오히려 속이 꽉 찬 결혼식이 되었다. 하객을 초청하는 기준도 딸이 자라면서 직접 알거나 인연이 있었던 친구와 친지들만 초청했다. 그렇게 하니 진심으로 딸 결혼을 축복해주고 결혼식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만 자리를 차지했다.
내 결혼식을 떠 올린다.
장인이 아내의 손을 잡고 결혼 행진곡에 맞추어 들어오면서 나에게 아내를 건네었던 장면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아내와 함께 딸에게 미리 부탁을 했다. 아빠 손을 잡고 가지 말고 혼자 당당하게 걸어서 가던지 아니면 신랑과 함께 걸어가라고 했다. 딸을 사위에게 건네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서로 독립된 인격체로서 만나 혼례 의식을 하는데 ‘잘 부탁하는 마음으로 건네준다’는 형식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어색하고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게 딸은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혼자서 의엿하게 식장을 걸어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을 신랑 신부가 함께 읽었다.
사돈이 덕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축하의 말을 전할 차례였다. 단상에 올라가 딸과 사위를 보면서 미리 준비한 덕담을 약간은 긴장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인사말을 하고 ‘사랑하는 딸 **’라고 말하면서 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감정의 흐름을 그냥 두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마음을 다시 추슬렀다. 어제저녁에 친구가 카톡을 보냈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는 불상사를 조심하라는 자신의 경험담을 보내 주었다. 오늘은 기쁘고 기쁜 날이며 이 날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인데 내가 감정에 과하게 반응하면서 초를 치면 안 된다.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는 덕담을 이어 나가면서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는 나태주 시를 낭독하면서 짧은 축사를 겨우 마쳤다. 결혼식의 피날레는 두 딸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멋지게 부르며 '판타스틱 듀오'으로 마무리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결혼식과 피로연이 끝나고 딸과 사위는 자기 집으로 나와 아내는 내 집으로 각각 돌아갔다. 떠나는 딸을 보면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암, 그렇고 말고’ 속으로 기도했다. 다음날 점심을 같이 하면서 결혼식 당일 날 받은 축의금은 빈봉투만 남기고 알맹이는 다 주었다. 결혼식 비용과 신혼여행 경비로 쓰라고 했다. 축의금이 담겼던 빈봉투는 빚으로 내 곁에 남을지라도 나는 기꺼이 행복한 채무자가 되기로 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처음 맞았던 낯설었던 결혼식이었지만 나름 의미가 있었던 예식이었다.
이제는 우리도 결혼 문화를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신랑 신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혼주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간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심지어 결혼식장에는 들어가지도 않고(혹은 못하고) 바로 식당으로 이동하여 스크린 화면으로 결혼식을 보는 둥 마는 둥 친구들과 떠들다 오는 결혼식도 얼마나 있었는가. 결혼식장 밖은 시장바닥의 북새통처럼 시끄럽고 다음에 이어질 결혼식으로 허겁지겁 끝내는 결혼식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나 역시 그런 경험이 많다. 진정으로 신랑 신부와 혼주를 축하해준 적이 있었을까. 이제는 초청받은 사람들만 참석하는 결혼식을 희망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하길 원한다. 더 이상 혼수, 예단, 예물, 폐백 등으로 인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없으면 한다.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되어 모두가 기뻐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결혼 예식이 되길 바란다.
결혼식 내내 아름답게 자란 딸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을 자식들 배고프지 않게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고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었던 그 아버지. 그을려 버려 사라진 아버지의 그 시간을 다시 돌릴 수는 없지만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고스란히 너희들에게 전해 주리라 다짐했다. 행복은 너희들 마음껏 누리고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는 주저하지 말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네 삶의 주인은 너희들이지만 고난이 올 때는 든든한 버팀목인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 죽는 순간까지 아들에게 더 잘해 주지 못해 속으로만 미안해했던 아버지, 딸의 결혼식을 마치면서 그 아버지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너무나 가까이 있어 당연한 이름
너무나 무심해 잊고 지냈던 이름
허나 지금은 부를 수도 없는 이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그 이름
사랑이라는 말로도
전할 수 없는 그 이름
이제야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