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두 번 당구 모임이 있어 가끔 강남이나 수원에 있는 당구장에 간다. 강남에 있는 당구장 한쪽 벽면에 “xx고등학교 당구회 연례대회” 현수막이 어지럽게 붙어있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흘러도 당구장에 와서도 명문고 이름을 내세우길 좋아하는구나. 주중 오후 늦은 시간이라 주위를 살펴보니 대부분 현역에서 은퇴한 베이비부머 들이다.
베이비부머가 시작되는 1955년생이 65세가 되는 해가 2020년이었다. 나 역시 베이비부머의 정 중앙의 세대로 3년 후인 2024년에 은퇴한다. 내 주위에도 은퇴한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다. 자기 사업을 하던가 아니면 의사, 변호사, 교수를 포함하여 몇 명의 공기업과 대기업 임원을 제외하면 모두 은퇴하고 제2막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군가 베이비부머 세대를 ‘3무 세대’라고 한다.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그나마 돈도 없는 세대라는 얘기다. 한국사회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자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제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전환점에 놓여 있다. 우리 또래는 줄 맞춰 일렬로 세우는데 익숙한 세대이다. 어릴 때부터 지켜본 내 주위의 친구들을 보면 딱 두 부류의 그룹이 있다. 한 부류의 소수 집단은 성적으로 줄을 서 보니 앞줄이다. 집안에서도 원했기 때문에 오로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으로 진출하여 자신의 성취와 경제적 안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부류가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친구는 성적에 맞춰 대학과 학과까지 선택하고 직장도 그냥 별 생각 없이 세상이 주는 잣대에 맞추어 들어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나도 두 번째 집단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 세대는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을까? 국민학교에서는 콩나물 시루 교실에서 시달리고 앞선 세대와 달리 ‘뺑뺑이’ 추첨으로 중고등학교 입학하고 치열하게 경쟁하여 대학에 들어갔지만 공부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그나마 범생들은 공부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끔 시국에 항거한 데모 하다가 그냥 아까운 청춘의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운이 좋아 경제성장의 덕택으로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앞만 보고 일했다. 사회생활은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선배의 충고로 저녁에는 직장동료들과 동종 업계 친구들과 혹은 고객 접대를 위해 부단히 술집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휴일에는 직장동호회, 동창회 등의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머릿수가 많았던 세대이기 때문에 그만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았다. 사회적 유동성도 컸던 시대라 성공할 기회도 많았다. 그런데 평생 직장인 줄만 알고 들어간 회사는 정년도 되지 않아 ‘명예퇴직과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쫓겨 나왔다. 나도 이미 IMF 환란시기에 '구조조정'이란 명목으로 쫒겨났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회사와 집에서 모두 찬밥 신세이다. 선배 세대로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다. 사실 그들도 모른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도전과 환경에 놓인 세대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정년 시간이 조금 연장되었을 뿐이지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당구나 치면서 시간을 죽일 수는 없겠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전부터 이력서 취미 칸에는 독서와 수영을 넣었다.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다양하지가 않다. 정말 혼자라도 시간을 보내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더 있을까? 물론 최근에 즐거움을 알아가는 산책과 산행을 넣는다. 뭘 더 배울까 고민했다.
요리를 배우자
가끔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얘기하는 ‘삼식이’란 소리는 우스개로 들어도 언짢다.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밥 먹는 것까지 평생 아내에게 의존하는 것이 불편하다.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제공하는 <기초부터 잡아주는 왕초보 요리>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매주 일회 씩 꽃게탕과 깻잎 멸치찜 등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이태리 요리강습에도 참가하여 굴크림 파스타와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 등 다양한 이태리 요리도 배웠다.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혼자 스스로 요리를 하니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고, 끝나고 나면 가족들과 같이 즐기면서 먹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아내의 평생의 짐도 덜어주고 나는 ‘독립선언’도 할 수 있다. 양파와 파슬리를 썰고 꽃게의 몸통을 가위로 반 토막 낼 때는 아주 불편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해물탕이 보글거리며 끓으면서 나는 구수한 냄새는 신선한 경험이다. 식용유와 물의 양, 약한 불과 중간 불에서 끓는 차이, 레드 와인이 고기의 냄새를 어떻게 잡아주는지 등에 대한 것도 배웠다.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리를 하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창의력이 필요하다. 창의력은 시인이나 화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식재료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 식재료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조합하여 맛과 향을 낼 것인가 두뇌활동을 활발히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야 하니까 플레이팅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한 컵, 접시와 쟁반 등 식재기도 알아야 한다.
문화센터 수강생 중에 중년의 남자는 유일하게 나 혼자다. 요리 강사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본다. 나는 “독립운동하려고 왔다”라고 생뚱맞게 답했다. 휴일, 아내와 함께 낮에 집에 있다가 12시가 지나면 아내에게 점심 식사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근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삼식이라는 농담도 있지만 밥만큼은 아내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가 독립적으로 요리하면서 먹어야 나도 편하고 아내도 편할 것이다.
사실 요리학원에서 배우는 특별한 요리보다 매일 먹을 수 있는 ‘일상의 요리’가 나에게는 더 필요하다. 당장 집 냉장고를 있는 식재료를 이용하여 지금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배워야 한다.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내는 흔쾌히 응했다. 첫 번째 요리가 ‘북어 떡만둣국’이다. 냉장고에 항상 식재료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다. 식재료를 모두 준비한다. 미리 뜯어 놓은 북어, 떡가래, 만두, 파, 참기름, 간장, 소고기 고명, 달걀이다. 먼저 냄비를 불판에 올리고 불을 켜고 약간 데운 다음 참기름을 냄비 바닥에 뿌린다. 북어를 넣고 강한 불로 북어에 고소한 맛이 베이도록 천천히 볶아준다. 어느 정도 볶인 상태를 확인한 후 물을 붓는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어느 정도 볶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물었다. 북어 색깔과 향과 느낌으로 해야 한다고 아내가 강조한다. 시행착오를 많이 해 봐야 알 것 같다. 일단 물을 붓고 떡을 넣은 후 한참을 끓인다. 중불로 오래 끓여야 국물도 우러나고 떡도 연해진다.
여기서 또 질문이 생긴다.
“언제까지 끓여야 하지요?” 이제는 공손하게 묻는다. 아내의 대답은 “물의 색깔이 뽀얗게 될 때까지”라고 한다. 내가 확인해보니 색깔이 뽀얗게 될 때까지는 한참 걸리는 것 같다.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이에 파를 씻고 총총 썰려고 하는데 아내가 말린다. 내가 옆에 보이는 과일 깎는 칼로 하려니 칼집에서 다른 칼을 건넨다. 생선을 다듬을 때, 과일을 깎을 때, 채소나 양파를 썰 때, 고기를 써는 칼, 심지어 빵을 자르는 칼도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와? 칼 종류가 이렇게 많았어?’ 갑자기 초딩이 된 기분이다. 국물이 뽀얀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적당한 때 만두와 파를 부었다. 그리고는 간장을 넣고 간을 본다. 소고기 고명도 함께 넣고 달걀을 풀어 넣었다. 달걀을 풀어 넣을 때도 한꺼번에 확 쏟아붓지 않고 냄비 안을 돌아가면서 넣어야 골고루 풀어진다고 아내가 가르쳐준다.
“예스 맴!” 조금 끓은 뒤 불을 끄고 접시에 옮긴다.
다음에 계속할 때도 헷갈리겠지만 혼자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는 맛이 여간 쏠쏠하지 않다. 앞으로 집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커피를 좋아하니 내년에는 문화센터에서 <원두에서 커피까지> 코스를 수강할 생각이다. <연필로 인물화 그리기>와 <이태리 인기 메뉴> 프로그램에도 등록했다.
이번 겨울도 배우느라 바쁘겠다.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은 글을 계속 쓰고 싶다. 누가 보든 관계없이 나의 생각과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과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물론 글이라고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글을 쓰면서 순간의 기억을 잡을 수 있고 나의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감흥이 새롭다. 한편으로는 ‘요런 생각밖에 못했나’ 하면서 부끄럽기도 하다.
마지막 세 번째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지금까지도 세미나 혹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느라 많이 돌아다녔다. 일하러 출장 가면서 시간 내어 여행하는 것과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부담 없이 홀가분하게 여행하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홀가분한 여행을 하고 싶다. 국내를 많이 돌아다니려고 한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의미가 있다. 새로운 경치, 처음 먹어보는 요리, 다른 모습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그 고장의 특유한 문화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사실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에너지를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리, 글쓰기, 여행과 산책을 통해 삶의 의미와 나의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 배울 것이 하나 더 있다.
나에게 산행의 멋스러움과 초행길의 동반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보여준 Y교수가 있다. 그는 산행을 가기 전에 미리 답사를 한 후 상세하게 설명한다. 둘이 산행을 갈 때면 내 도시락까지 준비하여 산 정상에서 함께 나누어 먹을 때 고마웠다. 내가 미안해서 김밥을 싸올 때도 반찬을 정성스레 함께 갖고 온다. 단체로 갈 때는 바람이 많이 부는 것도 미리 알아내어 바람막이 텐트까지 준비해서, 꼭 필요한 때와 장소를 골라 텐트를 쳐 동반자를 감동시킨다.
겨울 산행을 함께 하면서 동반자를 배려하는 Y교수의 마음 씀씀이도 함께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