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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위 사랑은 장모가 아닌 장인이?

by 엄재균

겨우 세제를 찾아 세탁기를 돌리고 난 후다.

건조기가 분리형이라 세탁물을 빼내어 건조기로 옮겨 넣었다. 벌써 30년은 족히 넘은 건조기이긴 하지만 내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아내로부터 한 번 사용법을 교육받고 처음으로 세탁물을 넣고 파워를 올렸다. 오래된 물건이라 시동을 거는 소리도 요란했다. 하지만 잘 돌아가는 것 같아 안심했다. 이제는 식기 세척기를 사용할 시간이다. 그동안 쌓였던 식기들을 차곡차곡 세척기에 넣고는 세제를 찾았다. 2가지 종류의 세제가 있기에 세탁기에 쓰던 것이 아닌 것을 넣고 문을 닫고는 역시 파워를 켰다. 서서히 조용히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왠지 뭔가를 했다는 뿌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큰애가 네덜란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초청받아 가면서 아내도 함께 따라갔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출국한 지 열흘이 지나는 즈음 그동안 먹은 식기와 세탁물이 쌓이면서 직접 작동을 해야 했다. 뭔가를 평생에 처음 사용한다는 것은 낯설고 불안했다. 건조기는 약 2시간이 지나도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나..?’


4시간이 지나도 계속 돌아가기에 강제로 파워를 끄고 세탁물을 끄집어냈는데 물기가 그대로 있었다. 아니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렸는데도 그대로라고?

이건 뭔가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확신했다. 네덜란드 시간에 맞춰 카톡으로 물어보니 옷감 종류별로 다이얼 세팅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 다시 자신감을 갖고 양말과 속옷을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또다시 한참이 지나도 역시 계속 돌아간다.

‘이건 뭐지?’


건조기가 워낙 오래되어 이제 ‘맛이 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속옷을 끄집어내어 그냥 베란다에 가서 자연 건조를 시키기로 했다. 근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혹시 가스밸브를 열었냐고~?”

"......"

‘흑~ 그렇지’


전기가 아니라 가스를 사용하는 건조기라 가스밸브를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가열시키는 열도 없이 4시간을 내부 건조통만 열일을 한 것이다. 마르지 않으니 건조기는 마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모른 나는 건조기 수명 탓만 하고 앉았으니 한심하다. 나이가 들수록 처음으로 마주치는 것은 늘 서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세탁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모두 날렵하게 사용할 수 있어 기쁘다. 사소한 일상의 생활 속의 일이지만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언제든 혼자도 할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요리 또한 연습은 많이 했지만 실제로 혼자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며칠 전, 둘째 딸이 사위와 함께 홀로 있는 나를 위해 주말 저녁에 찾아왔다. 아내가 카톡으로 남기고 간 레시피 중에 가장 쉬운 ‘가지볶음’을 하기로 했다. 사위가 도와준다고 하면서 자기는 순두부찌개를 맛있게 조리하겠다고. 대파를 써는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다. 군대에서 취사병을 하고 결혼하기 전에도 독립해서 살았기 때문에 요리를 많이 해 보았다고 했다.


‘음,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


사실 딸은 요리에는 흥미가 없고 디저트 케이크와 과자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서로 조화가 잘 맞겠다고 칭찬을 하면서 함께 요리를 했다. 3명이 부엌에 있으니 복잡하지만 마음만은 푸근했다.

난 가지볶음, 딸과 사위는 ‘순두부 찜’ 각각 두 개의 작품을 열심히 만들고는 식탁에 앉았다. 이런 좋은 날에는 술이 없으면 곤란하지 싶어 사위가 술을 잘 못하지만 와인을 한 잔씩 따르고 축배를 들었다. 이제 숟가락을 막 드는데 딸이 “잠깐만요~!”라고 한다.

“응~? 뭐가 더 필요하니?”

“아뇨 인증샷을 찍어 네덜란드에 보내야지요”

“그렇군”

“내 생애 처음으로 딸과 사위와 함께 합작한 작품인데 기록을 남겨야지”


곧이어 네덜란드에서 하트가 날라 왔다.

그리고 연달아 “감자조림, 된장찌개, 수육...” 레시피도 함께 날아왔다.


쉬운 요리를 먼저 하고 하니 뭔가 자신감이 생겼다. 든든한 요리사인 사위도 있으니 부족한 것이 없다. 더구나 매 주말에 와서 저녁을 하겠다는 기특한 소식을 전하고 갔다. 짧은 저녁 시간에 소박한 식사였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했지만 요리 잘하는 장모를 대신해 요리 초보인 내가 정성을 담아 사위에게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사실 처음에 아내가 딸과 함께 유럽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약간 걱정도 앞서긴 했지만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를 했다. 결혼 후 두 번째로 길게 떨어져 있지만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요리 학원에서 백날 배워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과 생존하기 위해 요리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밥을 하고 방을 청소하고 식기 닦고 세탁기를 돌리고 보리차를 끓이면서 일상의 집안일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그리고 소중한지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평범하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아내가 그동안 해왔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떨어져 있어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진리란 사실을 다시 느낀다.

같이 사는 반려견 ‘재롱이’는 내가 집에 있으면 늘 졸졸 따라다닌다. 직접 먹이를 주고 소변을 치우고 방에서 같이 있고 자는 과정에서 친밀감이 더 간다. 매일 산책을 함께 하면서 알게 모르게 책임감 또한 느낀다. 밖에 외출할 때도 항상 집에 혼자 있을 재롱이가 걱정된다. 이 놈은 혼자 있으면 먹지도 자지도 않고 한자리에서 현관문만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다가와서 나를 쳐다보면서 ‘끙끙’ 댄다. 아침에 깨어나서 밥과 물을 달라는 신호다. 나이가 많이 들어 한쪽 눈에 백내장이 와서 뿌옇게 보여 안쓰럽지만 그 재롱이가 오늘따라 더 귀엽다.


‘어휴 귀여운 내 새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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