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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마음대로 나가?

신경끄고 살 수 있을까…

by 엄재균

“xxx동기 장남 혼사, x월 x일(일) xx호텔...”


단톡방에서 결혼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 축하 메시지를 시작하면 단톡 친구들의 축하가 릴레이 하듯이 이어진다. 진심이 담긴 글도 눈에 뜨이지만 영혼 없는 메시지도 보인다. 평소 가깝게 지낸 친구라 나도 축하의 글을 정성껏 쓰고 싶지만 그냥 생략했다. 자주 보면서 이미 축하의 마음을 전했고 굳이 형식적인 글을 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축하의 글이 어느 정도 쌓이면 적절한 시기에 감사의 글을 올려야 한다. 잠깐 딴 일을 하다가 놓치면 눈치 없는 친구가 다른 글이라도 올리면 감사의 답장도 애매해진다.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감사의 답글도 다양하다. 그 짧은 글에도 그 사람의 성품이 담겨 있음을 느낀다. 형식의 예를 갖추었지만 뭔가 건조한 느낌이 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어떤 감사는 솔직한 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간혹 수명이 다해 저 아래에 잠겨있는 경조사 소식에 뒤늦게 댓글을 달아 다시 수면 위로 살려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친구도 있다. 소통에는 맥락과 타이밍이 중요하다. 같은 메시지라도 적절한 시간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역시 딸 결혼 소식을 총무를 통해 단톡방으로 올렸고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딸이 준 청첩장은 코로나19로 인해 만나지를 못하니 사용하지도 않고 폐기 처분했다.


이처럼 비대면 시대에서 디지털 기술이 각광을 받고 있다.

결혼 소식이나 선물 전달은 단톡방에서 간편하게 해결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만나서 청첩장이나 선물을 전달하기는 번거롭기도 하기 때문에 단톡방에서의 알림과 선물 전달 기능은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클릭 몇 번으로 스마트 스토어에서 싸게 상품을 구매하고 대금 결제까지 할 수 있다.


간혹 아주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편향된 정치적인 글이 올라오면 마음이 살짝 불편해진다. 그럴 때면 나오기도 부담스럽다. 경조사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대면 강의와 재택근무에서도 불편한 상황을 자주 만난다. 온라인 강의에서는 처음에 학생들이 화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도 매번 요구를 해야 비디오를 켠다. 재택근무 중에 온라인 회의에서도 화면을 가리고 다른 일을 하거나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 회의에 참석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온라인 방식은 편리하지만 형식과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자신의 의사를 온전히 전달할 수도 없다.


나는 출근을 하지 않고 학생들도 통학시간을 절약하면서 집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어 편리했다. 근데 온라인 강의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비대면 실시간 강의를 하더라도 컴퓨터 화면만으로 강의하면서 학생과 소통이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물론 소회의실 운영을 통해 자발적으로 토론하는 방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고 감정을 전달하면서 강의할 때와는 소통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나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한계이다. 가능하다면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그나마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고향에 있는 절친이 연락왔다. 얘기 중에 ‘산을 좋아하는 모임’의 단톡방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 방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하여 소식이 궁금했던 친구도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동네 뒷산 오르듯 가는 친구, 주말 새벽같이 산에 올라가 일출의 멋진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었다. 산길에 마주치는 꽃마다 친절하게 이름 말까지 붙여 사진을 올리는 친구도 있다. 반가웠다. 매일 동네 공원만 산책하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세계요,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도 매일 눈팅만 하고 즐길 수는 없지 않은가?

무언가 단톡방에 기여할 일이 없을까 하던 차였다. 단톡방에 초대한 친구가 브런치의 내 글을 그곳에 공유하기를 원했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내 삶과 생각을 드러내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 생각하고 흔쾌히 동의했다. 내 글을 보고 공감을 표현하고 구독자가 된 친구도 있어 기뻤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서 감정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온라인에서 소통하는 방법도 나름 좋았다. 친구들의 산행 소식에 ‘좋아요’ 댓글을 달았지만 정작 내가 친구들에게 더 보태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관심이 덜해지기도 하였다. 오프라인에서 등산모임도 하지만 대구 근처의 산을 오르기 때문에 먼 길을 떠나 참가할 열정도 없다. 내가 계속 단톡방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즈음이었다.

정치적인 글을 가끔 올리는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지나갔다. 근데 또 그런 글을 올렸다. 여기는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의 동호회 모임에서 굳이 왜 이런 글을 올릴까? 불편했다. 계속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탈퇴하고 나면 무슨 뒷말이 나올까 잠깐 고민했다. 평생을 남의 눈치를 보았는데 이제 그만 눈치 보고 살자. 서로 맞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누리기도 짧은 인생인데 기여할 것도 없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는데 남아있을 필요가 있을까?


스웨덴의 정신과 의사인 안데르스 한센이 쓴 <인스타 브레인>에서 SNS 사용방법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기만 하고 자기 사진을 올리지 않거나 댓글을 통해 소통하지 않는 수동적인 사용자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이다. 페이스북의 모든 활동 가운데 약 9%만이 적극적으로 소통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내가 그 89%의 소극적인 사용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수동적이니 관심이 줄어들고 소통이 잘 되지 않으니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현상이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단톡방에서 조용히 나가고 싶은데 쉽게 나갈 수 없다. 그 이유가 있다. 곧바로 “xxx님이 나갔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기 때문이다. 뒤끝이 조금 무겁지만 어떡하랴? 불편한 자리에 눈치 보면서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카카오는 의도적으로 단톡방에서 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xxx님이 나갔습니다.”라는 기능을 삭제하라고, 카카오 고객센터에 건의를 하겠다고 한다. 물론 어림없는 소리다. 한 기사에 따르면 카카오는 이렇게 의례적인 답변을 했다고 한다.


“단톡방을 나간다는 알림을 설정한 것은 메신저 서비스 특성상 수신자와 발신자 양쪽을 고려한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변경 계획이 없다. 해당 기능을 없앨 경우 단톡방에 해당 멤버가 나갔는지도 모른 채 대화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카카오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객이 노란 박스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나가기’ 기능을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능한 많은 단톡방에 오래 머물면서 카카오 뮤직, 뱅크, 부동산, 증권, 선물, 프렌즈, 골프 예약, 택시, 대리기사, 카풀, 브런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서비스를 이용하기를 원한다. 그게 돈이 되니까.


‘어딜 네 마음대로 나가...!’

카카오의 마케팅 전략이다. 들어올 때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들어올 수 있는 기능이 있어도 나갈 때는 쉽게 못 나가게 만들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것이다. 왜 이 작은 결정도 주체적으로 못하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바로 ‘나가기’ 버튼을 꾸욱 눌렀다.


디지털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으로 얻은 편리함 속에서도 명암이 있다. 지구촌 사람을 모두 연결해주는 것을 비전으로 내세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대표적인 주자인 페이스북이 있다. ‘좋아요’를 이용하여 사용자에게 도파민을 활성화시켜 보상을 제공해줌으로써 나가지 못하게 계속 잡아 끌어들인다. 유튜브는 그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추천 알고리즘 때문에 폐해가 심각하다. 특히 정치적인 편향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최신 음악과 교양 콘텐츠 등의 양질의 정보뿐만 아니라 편향된 뉴스와 가짜 정보도 함께 넘쳐난다. 양날의 칼이다.


카톡도 예외는 아니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뜨면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설계를 한 탓이다. 마지막 ‘1’ 숫자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다시 메시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 갇혀 어느새 디지털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편향된 과잉 정보에 의해 사회적 신뢰는 오히려 단절되고 붕괴되고 있다. 세대 간, 남녀 간, 빈부 간, 정치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지금 우리는 모든 생활양식이 디지털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디지털 서비스 제공업체는 한번 잡은 고객을 떠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발목을 잡게 만들었다. 카톡과 네이버 검색, 이메일, 교통정보, 내비게이션 서비스 등은 돈을 내지 않고 사용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이렇게 끌어들인 사용자가 끊임없이 휴대전화를 잡게 만들고 정보를 과잉으로 습득하고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게 한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하여 정보의 바다에서 질식할 정도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많이 먹어서 칼로리 과잉 문제뿐만 아니라 과잉 정보로 인해 감내해야 할 피해도 만만치 않다. 과잉 섭취로 인한 과체중과 비만이 성인병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너무 많이 먹어 당뇨병과 함께 대사증후군으로 죽는 사람이 굶어 죽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졌다.


과잉 정보 또한 마찬가지다. 그동안 독점적인 정보 생산과 수집으로 특권을 누렸던 신문 방송업이 사양 산업으로 전락했다. 정보를 검색하고 정보를 모이게 하는 플랫폼 기업인 구글과 네이버 및 카카오가 그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과잉 칼로리로 인해 육체적 건강에 피해를 주는 것처럼 디지털화로 인한 과잉 정보가 양날의 검이 되어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다.


처음에는 뉴스를 보거나 검색할 목적으로 들어갔다가 몇 시간을 엉뚱한 자료와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내가 왜 지금 무엇을 검색하려고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되는 황당한 경우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SNS는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그렇게 사용자가 검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광고주에게 우리의 정보를 팔거나 직접 그 정보를 비즈니스에 활용한다.

단톡방에 내 의사와 관계없이 목덜미를 잡힌 채 강제로 초대를 받은 황당한 경우도 있다. 탈퇴를 하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수인 신세가 된다.

단톡방을 나간 후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가면서 인사도 하고 양해를 구하고 나올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렇게 불쑥 인사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누군가는 얘기한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하지? 신경 끄고 살면 되는데...”


아니다. 신경 끄는 것도 나같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사람이 있다. 지금도 나처럼 신경을 끄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차마 나오지 못하고 단톡방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제는 불편하면 과감하게 단톡방에서 나오자. 나가는 사람이든 남아 있는 사람이든 서로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디지털 문화가 정착될 시점이 되었다.

“어딜 네 마음대로 나가?”

‘카톡’ 음성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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