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낯섦과의 만남 - 금지된 재현

익숙한 것과 결별할 시간

by 엄재균

‘나’라는 존재의 무상함은 우주에서 지구를 볼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모습을 보면 칼 세이건이 얘기했듯이 광활한 우주 속에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Bot)과 같다. 그 푸른 점에서 티끌과 같은 ‘나’라는 존재가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다가 소멸한다고 생각하면 뭘 안다고 떠들어대거나 잘 났다고 으스댈 수가 없다. 교만했던 마음이 저절로 겸허해진다.


이제는 창백한 푸른 점에서 나의 삶을 돌아볼 시간이다. 인류의 현인인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온 나의 생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잠시 생각한다. 삶을 돌이켜보면 극적인 사건들이 많아서 모든 것이 운명이라 생각할 수 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은 운명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럴 때면 팔자소관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은 운명이라 여기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도 정신건강에도 좋다.


하지만 삶의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우연이 생기고 타고난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려는 의지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체험했다.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삶이다. 운명과도 같은 삶도 사실은 자신이 인생을 통해 매일 선택한 결정에 따른 결과로 나타난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넘길 때 비로소 의미 없는 삶을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 한 번 밖에 없다. 결코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한 번뿐인 삶에 의미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삶의 의미를 찾겠다고 거기에 집착해서는 곤란하다. 행복에 집착할수록 행복은 더 멀어지는 것과 같다. 행복이 우리의 일상에 있듯이 삶의 의미도 분주하고 단조로운 생활 속에 있다. 가끔은 익숙했던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낯설게 보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술은 평범한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역할을 한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위의 그림을 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는 <금지된 재현>에서 거울을 보는 사람의 앞모습 대신에 뒷모습을 그대로 그렸다. 마그리트의 후원자인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제임스의 거울에 비친 자화상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초현실주의 거장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작품 중에 <금지된 재현> 원본 앞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이하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면 당연히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에드워드 제임스의 뒷모습이 그대로 비친다. 얼굴 없는 자화상이다. 일상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관람자가 기대했던 익숙한 자화상을 아주 낯설게 만들어 우리가 보는 세상을 색다르게 표현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거울에 대한 표현을 낯설게 만들었다. 거울은 항상 세상 속에 나를 보여주고 싶은 앞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삶, 나의 페르소나이다.


우리의 뒷모습에는 사랑과 부귀, 명예를 향한 거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상처와 아픔도 함께 있다. 뒷모습은 내가 세상 속에서 보여주기 싫지만 진솔하게 재현된 금지된 모습이 아닐까? 난 이 그림을 그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말하는 앞모습이 아니라 행동하는 뒷모습을 통해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할 수 있다. 나의 뒷모습에 비친 욕망과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며 남은 생의 미래를 호기심으로 열 수 있기를 원한다. 또한 인생 후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머릿속으로는 무엇을 해야 했고 또는 하지 말았어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운동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고, 좋은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도 잘 알고, 글쓰기는 정신 건강에 좋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육체는 살아오면서 익숙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낯선 것은 왠지 불편하다. 불편한 것은 멀리한다.


가끔은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 필요하다. 익숙한 습관을 버리고 낯설고 불편하지만 새롭게 행동하면서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있을 때만이 현재를 충만하게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익숙해져 버린 낡은 습관을 버리고 사소하지만 새로운 습관을 들이면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다. 특히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베이비부머 세대뿐만 아니라 은퇴를 준비할 오십 대 세대도 낡은 습관이 무엇인지 찾아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강박에 사로잡혀 자학은 하지 말자. 뭐 안되어도 좋다. 먼저 우리 육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면 된다. 다시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면 된다. 금연에 성공하듯이 말이다.


내가 경험한 중에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작은 변화를 주려고 한 습관들이 있다. 만보 걷기, 메모하기, 글쓰기, 알아차림 그리고 아침 15분 루틴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생각만으로는 작심삼일 증후군에 시달린다. 행동으로 옮겨야 작심만일이 되어 평생의 습관이 된다. 목표를 정하고 아주 조금씩 성장하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 된다. 그 성취감으로 인해 일상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의미도 느낄 수 있었다. 몸은 늙어가지만 어제보다 조금씩 달라진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정신은 고양된다. 지금은 한 생애에 두 번의 삶을 살아가는 백세 시대이다.


환갑을 지나면서 두 번째 인생을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불과 70년 전인 1950년대 전쟁 기간의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5세였다고 하니 말 그대로 두 번의 생을 살고 있다. 첫 번째 삶은 가족을 위해 살았다면 두 번째 삶은 나를 위해 살고 싶다. 새로운 직업을 가지고 살고자 한다. 두 번째로 사는 인생이니 처음과는 다르게 세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조금은 뻔뻔하게 세상 눈치를 보지 않고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할 의미도 생겼다. 그 두 번째 삶은 글 쓰는 전업작가로 살아가고 싶다.


40, 50대부터 내가 좋아하는 습관을 들여야 육십부터 건강을 유지하면서 계속 지속 가능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생활 습관과 자신의 생각을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미리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위한 인생은 늦어도(!!) 오십 대에 이미 결정된다. 건강과 경제적 안정을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 40, 50대라면 최적의 시간이고 60대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