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인생을 살다 보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삶의 변곡점이다.
대학 졸업 후 사관후보생을 거쳐 공군 장교로 단기 복무했다.
공군 장교는 전공에 따라 직무를 부여받기 때문에 나는 시설(육군에서는 공병) 특기를 받았다. 중위로 진급하여 공군본부 소속이 되면서 오산 미군기지에서 한미 공군이 공동으로 발주한 공군작전통제센터 건설의 감독 업무를 하였다.
중위 말년에는 현장을 옮겨서 공군사관학교 건설현장에서 민간기업의 건축현장에 대한 감독업무도 맡았다. 건설 현장에서는 휴일이 따로 없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와서 공사를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야 쉰다. 공사기간에 맞추기 위해 밤늦게 ‘콘크리트 타설’하여 새벽에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소위 얘기하는 '노가다' 생활이다.
감독관 임무를 맡은 나는 콘크리트 타설 공정의 진행 상황을 점검한 후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현장기사들은 꼬박 밤을 새우면서 인부들을 관리해야 한다. 현장기사로 근무하는 선배장교들을 보고 내가 전역을 하면 저 자리에 있을게 눈에 보인다. 사회에 나가서도 이 ‘공사 막일’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경험을 하고 나니 그 길은 생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길이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것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만약 당시에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자서전이라도 읽었다면 건축가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안도 타다오는 자기의 삶을 돌아보며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고 가장 재미있어하는 건축을 하면서 살아간다”라는 자기 고백에서 인간의 품격이 느껴진다. 췌장과 쓸개 절개 수술을 받은 후에도 그의 건축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 모른다. 나는 당시에 그런 열정도 없이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의 바람에 휩쓸려 온 것이다.
건설현장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비가 오면 가끔 현장 소장들이 감독관실에 찾아와 시내에 목욕이나 하러 가자고 한다. 처음에는 사양도 했지만 선배이기도 하여서 계속 거절할 수만도 없어 마지못해 동행했다. 동기들과 함께 시내에 오랜만에 나가 목욕도 하고 거나하게 식사도 하고 술자리를 갖는다. 소위 요새 말하는 ‘갑질’을 톡톡히 한 것이다.
약 8개월이 지나는 무렵 건축공사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공사에 속도가 붙을 즈음이다. 어느 날 내 몸이 예전과 달리 전 날 술을 먹고 나면 다음 날에도 회복이 되지 않고 피곤했다. 과음을 해서 그렇지 하다가 계속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때 동기가 병원에 가서 간 기능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였다.
어렵게 월차를 내어 대구로 나와 간 기능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받아 보니 B형 바이러스로 인한 간염이라고 한다. 약을 받아 먹으면서 공사현장에 복귀하여 감독 업무를 계속하는데 여전히 회복이 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겨우 날을 잡아 대전 국군 통합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만성간염으로 진단을 받았다.
결국 나중에 통합병원에 3개월 장기 입원하였다.
대전 통합병원에 입원하니 장교 병동에는 말 그대로 육해공 3군 통합 병실이다. 다 들 얼굴이 누렇게 떴는데 나 혼자 얼굴은 말짱했다. 나이롱 환자처럼.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점호만 받으면 시간은 자유롭다.
번잡한 건축공사 현장의 감독생활에서 벗어나 환자복을 입고 병실에 와 누워 있으니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하다. 현장에서는 골조가 올라가고 실내 마감공사가 들어가면 감독업무도 더욱 많아지는데 어쩌지? 마침 후배 장교가 대신 일을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마음이 놓였다. (지난 여름 밴쿠버로 여행하면서 그곳에 오래 전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그 후배를 만났다. 부부와 함께 골프도 치고 옛날 건설현장에서의 추억도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신세를 조금이라고 갚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다시 신세만 지고 왔다. 고맙다.)
시간은 흐르고 조용한 병실생활에 적응하면서 나의 현실적인 진로 문제가 코 앞에 닥쳤다. 그동안 바쁜 생활 속에서 한 번도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막일 생활'은 싫고 사회에 나가서 무얼 하면서 먹고 살지?
그날도 침대에 누워서 밖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햇빛이 내리 쪼이는 아직 조금은 쌀쌀한 초 봄날 늦은 오전이었다.
딱 요즘의 날씨였다.
병실 밖에는 황달기로 얼굴이 노랗게 뜬 환자들이 봄볕을 받으며 쭈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얘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어릴 때 호기심에 병아리를 키우던 기억이 떠 올랐다. '노란 병아리'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살리기 위해 바깥 햇볕을 쪼이면서 모이를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다 결국 죽어버린 노란 병아리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밖에서 쭈그리고 있는 저들의 모습이 내 현실이고, 죽어가는 '노란 병아리'의 운명과 같았다. 창밖의 봄날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한데 나의 마음은 죽음까지 떠 오르면서 갑자기 깜깜해졌다. 병든 병아리 같은 처지로 인생을 끝낼 수는 없었다.
나의 미래가 걱정은 되지만 뾰족한 희망은 보이질 않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실로 오랜만에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생각은 했겠지만 그동안 바쁜 생활 속에 차일 피 미루었다. '어떻게 되겠지 뭐?' 하고는.
이제 턱 밑에 다가오니 마음이 심란했다. 문득 '내가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고 끊임없이 생에 대해 물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 가장 어려운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 질문에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전까지는 그냥 물이 흐르는 데로 휩쓸리면서 불평만 하고 원망하고 살았다. 고등학교에서도 병치레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시국이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면서 보냈기 때문에 이제 한번 제대로 ‘원 없이 공부'하고 싶었다.
이제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떻게 도피할 길도 없는 절벽에 서 있으면서 앞길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였다. 햇빛이 따스하게 쪼이는 화창한 봄날, 느닷없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냐고?'라고.
'그래, 다시 공부해 보자'라는 갈망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지금까지 부모님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살았을 뿐, 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없었다. 물론 대학입학도 내가 결정은 했지만 사회가 원하는 방향에 내가 거기에 맞추었을 뿐, 내 스스로 자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내 인생에 내가 주체가 되고 싶었다. 그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내 생의 변곡점이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Attitude)가 바뀌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고,
한번 제대로 살아보자는 결심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짧지 않은 환자 생활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그때는 젊었으니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었다. 육체적 질병이 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서 정신분석학에서 "로고테라피 - 의미 치료학" 분야를 개척한 학자가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과 더불어 세 번째 심리치료 방법이다.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모와 아내 그리고 남동생을 모두 잃는 비극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서야 아내와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어 우울증과 자살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인 본인이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우울증 늪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면서 강제 수용소 시절을 돌아보면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 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책 발간 후 다시 빈에서 신경과 의사로 진료를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로고테라피’라는 독특한 정신치료법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선택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이다.
공감한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 시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선택이다.
물론 포로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환경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는 인생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과정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부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던 시각이 바뀌었다. 뒤늦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즈음 고등학교 동기 중의 한 명은 벌써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회계사 사무소를 개업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경쟁심도 자극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미국 대학원에 가려고 한 것도 막다른 길목에서 한 번 도전하고 돌파구를 만들고 싶었다. 한때 오산 미군부대에서 미군무원과 함께 근무하면서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통합병원에서 유학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병원은 야간 9시경부터 전체 소등을 하기 때문에 그 후로는 책을 볼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담요를 덮어 랜턴을 켜고 그 속에서 토플 공부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고 공부를 한 후에 정식으로 토플시험을 치렀다. 예상보다 성적이 저조하다.
내 실력이 드러났다.
그동안 미군무원과 함께 근무하면서 영어를 익혀 왔다고 생각했는데 객관적인 실력은 바닥이었다. 결과를 분석하니 문법에서 점수를 많이 감점받았다. 그 다음부터 기출문제를 구입하여 다 풀었다.
그런 후, 시험을 보니 미국 대학에 요구하는 성적보다 더 잘 나왔다. 미국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수학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격시험으로 경영대학원은 GMAT, 일반대학원은 GRE 시험을 봐야 한다.
원래 경영학으로 전과하여 공부하려고 GMAT 문제집을 구입하여 공부했다. 공부하는 도중에 “산업공학”이라는 학문을 발견하고 그 정의가 그럴싸하게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학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전혀 생소한 경영학, 그것도 경영대학원으로 들어가 공부하는 것이 부담되기도 했다.
산업공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GRE 시험으로 바꾸어 공부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즉흥적이었다. 조언을 받을 선배나 친지도 없었다. 경영대학원으로 진학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항상 가지 않았던 길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미련은 있었지만 다른 길을 택하였다.
그 길에서 끝까지 밀고 나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후회는 없다.
당시 대학원에서도 전과를 하였기 때문에 '조건부 입학'이라 약간은 불안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나의 고민은 나를 오히려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만약 통합병원에 입원하는 일 없이 감독관 생활을 계속한 후 전역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국내 건설현장에서 혹은 중동 현장을 오가며 건설현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에 접어들었을 것 같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국군 통합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세월이 흘러 주기적으로 간염 검사를 위해 다니던 내과에서 어느 날 의사가 신기하다며, 이런 경우는 드물다면서 전해준다. “B형 간염 바이러스가 모두 사라졌다고”
이렇듯, 삶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졌듯이 인생의 변곡점도 뜻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우연한 기회로 찾아온다. ‘그 뜻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 사건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는가이다. 선택은 개인의 자유의지다. 20대까지 갈팡질팡 하던 나에게 닥친 시련이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이다. 국군 통합병원에서의 나의 선택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는 원망도 많이 했다.
그때는 몰랐다. 시련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그것이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다만 한가지, 내 삶을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처음 느꼈다.
20대를 지나면서 거친 삶의 첫 번째 변곡점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난 다음, 모두들 자신이 훈련받거나 근무한 쪽으로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대전에 일이 있어 가면 지금은 이전했지만 그 주위를 둘러보면서 옛날을 회상한다.
국군 대전통합병원에서의 기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