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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Feb 27. 2022

3할배투어(2) - 취미가 뭐예요?

평생을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뭐가 있을까?

“취미가 뭐예요?”     


대학시절 미팅할 때 서로 묻곤 했던 조금은 진부한 질문이다. 뭔가 공통분모를 찾기 위한 노력은 아닐까? 동질감을 느끼면서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작업이었다. 뜬금없이 축구를 좋아한다거나 복학생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시작하면 그날은 파트너로부터 퇴짜를 받아 마땅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취미가 다양하지 못하여 음악과 영화 감상이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 많이 응답했다. 지금은 굳이 취미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일상의 삶으로 들어왔다.

      

군 시절로 돌아가 본다, 중위 때 영외 장교 막사에서 거주했다. 숙소 뒤편에 숲이 있고 앞쪽으로는 공사현장이 있는 임시숙소로 다소 삭막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주로 잠만 자고 나오기에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가끔 숙소에서 저녁 회식이 열리기도 했다. 그날도 동기생의 생일이라 저녁을 함께 먹고 술과 음악으로 여흥을 즐기던 추운 겨울밤이었다.      


술도 거나하게 취하고 소변이 마려워 문을 열고 나오는데 밖은 온통 백색 천지였다. 함박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고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장관이었다. 숨을 쉬면 입김이 눈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장실이 멀어 그냥 수풀 근처에서 볼일을 보는데 숙소의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들려왔다. 방에 있던 동기생이 음악을 틀어 놓았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그날따라 도입부가 압권이었다. 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인 장면을 배경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홀로 듣는 피아노 협주곡은 환상적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한참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곡을 감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눈 덮인 설원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도 함께 떠올랐다.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차이콥스키의 피아노곡과 함께 음악이 내 삶 속 깊이 들어왔다.

     

오래전, 영화 <피아니스트>를 감명 깊게 보았다. 전쟁 속의 유대인 학살의 참혹한 실상을 보여주고 가족과 일상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차가운 겨울밤, 주인공 슈필만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에 독일군 장교 앞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모습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에게 진한 감명을 주었다.     

 

그것도 독일 작곡가인 베토벤도 아닌 폴란드 태생의 쇼팽 곡을 나치 장교 앞에서 연주하는 폴란드 연주자의 초라한 모습. 전쟁의 폐허 속의 참혹함과 예술가의 혼을 느낄 수 있는 명작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음악이 나에게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쇼팽의 발라드와 야상곡은 내 삶에 안정감과 위로를 전해주었다. 영화음악은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비천함과 위대함을 함께 표현하여 우리를 차원 높은 예술의 세계로 초대한다. 저녁에 조용히 혼자 있을 때 쇼팽의 <야상곡>을 듣는다. 내 마음속 어지러이 떠도는 먼지가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기억난다. 시드니 폴락 감독이 1985년 덴마크 출신 카렌 블릭센의 자서전 <Out of Africa>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다. 영화 초반부에 아프리카 대륙의 자연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이 흘러나온다. 영화 속 주인공 데니스 해튼(로버트 레드포드 분)이 영국에서 가져온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음악이 아프리카의 들판을 넘어 카렌 브릭센(메릴 스트립 분) 마음에 울려 퍼진다.      


영화 속, 데니스와 카렌의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다. 이 순간만은 단조롭기만 한 일상은 멀리 날아가고 클라리넷 선율과 함께 나의 버켓 리스트에 있는 아프리카 대초원과 장엄한 석양을 즐길 수 있다. 현실이 힘들 때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으면서 삶의 위로를 받는다.      


음악은 삶에 활력을 주고 의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이다. 발라드, 팝, 재즈, 뮤지컬, 리듬 앤 블루스, 클래식, 크로스오버 음악으로 넘어가면서 경계가 없다.

  

우리나라 성인남녀의 주된 취미는 무엇일까? 2019년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1위는 등산, 2위는 동률로 각각 음악 감상과 운동/헬스였다. 취미라고 하면 뭔가 남에게 내세울만한 것을 생각한다. 골프나 스키 혹은 승마처럼 아주 특별나고 폼 나는 운동을 떠올린다. 아마 50대 이상의 남성은 당구도 포함될 것이다. 이런 취미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역랑이 부족하면 즐기기가 어렵다. 특히 운동과 음악 연주를 즐기려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연습하고 배우는 과정을 즐겨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 시작하려면 말처럼 쉽지 않다.     


취미란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서 일터에서 삶에 치여 사는 시간에서 살짝 벗어나 잠시 숨 쉴 곳이 있는 시간이다. 일상은 너무나 단조롭다. 어제가 오늘같고 내일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취미는 단조로운 삶에 균형을 잡고 활기를 넣어준다. 직장일은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취미는 그것을 떠올리면 설레기도 하고 사랑하고 계속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취미활동도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취미를 즐기는 수준이 깊을수록 삶의 수준도 함께 더 풍성해진다.  


나는 요즘 요리할 때가 즐겁다. 3개월 동안 아내가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에 혼자 요리를 배우고 직접 해서 먹었다. 대구에서 친구가 위문공연을 온다는 핑계로 집으로 찾아왔다. 코로나19가 심각했던 시기라 집에서 직접 요리했다. 그동안 배웠던 이스라엘 요리인 <샤슈카>와 스페인의 <감바스 알 아히오>를 와인 안주로 대접하면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친구들이 즐거워하며 잘 먹을 때 뿌듯함을 느꼈다. 나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요리할 때 더 신이 난다.      


최근에는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


3명의 공군 장교 동기생이 모여 전국의 5일 장터를 가면서 그 고장의 사찰과 유적지도 함께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아들과 딸이 베이커리 카페를 준비하고 있어 우연히 함께 의논하고 가게를 둘러보면서 의기투합이 되어 모임을 만들었다.   

   

<지난 여행에서 본 부석사 무량수전>


이름은 잠정적으로 <삼할배 투어>라 지었지만 너무나 직관적이라 나는 <삼호할투>로 제안한다. “3명의 기심에 충만한 배들의 어 프로그램”을 줄인 말이다. 지금까지 양양, 홍천, 부안, 삼척, 단양의 오일장을 포함하여 여덟 번을 다녀왔다. 오일장에서는 고장의 특산물과 식재료, 반찬거리를 산다. 아내들도 이 모임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차를 타고 1~3시간 정도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수다가 시작되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각각 전문분야가 있다. 남풍이라는 호를 가진 친구는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에 나와도 될 수준이다. 수필집 <왜 그러고 다녀>와 <장 담그는 남자>를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또 다른 친구는 여행을 기획하고 일정을 짜고 현장에서 시간에 맞추어 여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유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불러내어 상세하게 차 안에서 설명한다. 친구가 점심 메뉴로 <허영만의 백반 기행>의 맛집을 미리 소개하면 현장에서 모두 동의하에 선택하여 점심과 저녁까지 즐긴다.


다음 여행은 신륵사, 영릉, 여주 오일장을 방문한다는 계획이 카톡방에 떴다. 추어탕과 나물 밥상, 돌솥밥이 후보 맛집으로 추천되어 올라왔다.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여행은 시작되었다. 인터넷으로 미리 유적지의 역사를 찾는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여행도 기대가 된다. 사찰로 가는 길에 산을 오르기도 하면 보통 만보 이상은 거뜬히 걷는다. 여행 후에는 몸과 마음이 깨끗이 씻기는 느낌이다. 세 명의 할배들이 호기심을 갖고 여행하는 설렘과 즐거움을 계속 누리고 싶다.


기억에 떠오르는 또 다른 친구 할배가 있다.

공군에서 제대하고 난 후였나? 내가 유학간다고 하니 친구가 내가 머물고 있는 대구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께 인사하고 잠깐 머물다 갔다. 그리곤 미국유학 초기 시절, 타국에서 낯설고 힘들었을 때 이 친구가 안부 편지와 함께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떡하니 보냈다.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어떤 친구인데 사진까지 보냈어요..?"  

"인정과 의리 빼면 몸무게가 5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는 인정이 넘치는 친구~" 이 친구가 지금은 공군 장교동기회 총무를 맡아 경조사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 달려가서 봉사하고 있다. 고맙다 친구야..!


평생 즐길  있는 취미를 가지고 좋은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살면서   중의 하나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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