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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걸

Born This Way

by 엄재균

“쟤는 왜 오이를 먹지 못할까?”

“이상한 사람이야”

“이해할 수가 없어”


한 때,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 오싫모>라는 것이 생기면서 회원수가 10만 명을 초과했다. 대중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향해 “반찬투정을 하느냐”, “아이도 아닌데 편식을 하네”라는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나 역시 ‘이렇게 상큼한 냄새와 아삭한 식감을 왜 싫어할까?’ 이해할 수 없었다. 느닷없이 그들은 다수의 집단에서 벗어나 타인으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는 소수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채식주의를 고집하고,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고기를 먹지 않으면 이성을 찾지 못한다. 나는 처음에 채식주의자를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다고 세상이 뭐 달라져? 어떻게 풀때기만 먹고사는 게 가능하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파트너를 잘 갈아치우는데, 소수이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파트너에게 평생을 다해 아끼고 사랑한다. 어떤 친구는 성별이 같은 사람과도 같이 산다. 또 다른 친구는 우울증에 빠지고 어떤 친구는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되기도 한다.


정치적인 성향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 집단의 사람 모두가 반대편 사람들이 왜 엉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정치적 의견이 다른 집단의 사람은 그 집단의 의견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여 서로 경멸하고 배척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이 극단의 중간 즈음에 있으면서 양쪽을 보고 또 혀를 찬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너무나 다르다.

왜 이렇게 다를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실마리를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찾았다.


책에서 우리의 많은 부분은 엄마 배 속에서 수정될 때 물려받은 유전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레이디 가가의 노래 <Born this way - 원래 그렇게 타고 난 걸>에서의 가사처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운명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에 절대적으로 얽매인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라나는 것 또한 더 중요하다고 한다. 마치 자신이 받은 카드의 패는 바꿀 수 없지만 그 카드로 최선의 게임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의해 유전자의 발현이 변하고 어떻게 세대를 이어 전달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스트레스, 학대, 가난, 굶주림 등이 희생자의 유전자에 흉터를 남겨 세대를 거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긍정적인 후성유전도 함께 연구한다. 타고난 유전자가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오이를 못 먹는 사람들도 오이의 주성분인 '노다디엔올' 성분 때문에 독특한 향을 뿜어낸다. 이 성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불쾌한 느낌이 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향긋하고 시원하게 느낄 것이다. 원래 그렇게 타고난 것이다.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수의 사람은 주위에 늘 있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도 사회적 소수자이다.

소수자의 삶을 돌아본다.

내가 소수자로 살아보면 어떨까?.


당장 바다 건너 미국이나 유럽으로 여행을 하면 내가 소수자인 것을 몸으로 느낀다. 이방인이면서 소수자는 늘 다른 다수자들의 눈치를 본다. 식당을 가서 메뉴를 고르고 주문할 때도 왠지 주눅이 든다. 제대로 주문을 했는지, 팁은 얼마를 놓고 가야 하는지, 모든 것이 낯설고 더구나 나는 피부 색깔도 다른 소수자다. 내가 제대로 주문을 하고 있는지 자기 검열까지 한다. 소수자의 비애이다.


한국에서는 ‘소비자는 왕’이라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문을 하기 위해서도 종업원과 일단 눈이 마주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감히 ’ 벨’을 눌러 종업원을 호출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소수자가 겪는 낯섦이다. 외국에 나가면 내 돈 내고 내가 사 먹는 데도 여러 눈치를 봐야 한다.


외국에서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라도 하면 더 소수자의 힘겨움을 느낀다. 선진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을 만들었지만 현실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는다. 어떤 경우는 언어 소통이 힘들어 차별 아닌 차별을 느낄 때도 있다. 자격지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이렇게 대놓고 차별을 해?’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는 어떨까?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서 주문을 받을 때 억양이 조금이라도 이상하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바로 종업원의 얼굴을 쳐다본다.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조선족, 혹은 스리랑카에서 온 얼굴색이 검으면 다시 한번 더 째려본다. ‘다시 얘기를 해야 해?’라고 짜증 난 모습을 하면서 종업원을 대한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소수자의 인격은 침해받기 쉽다.


우리는 오이를 싫어하는 소수자에 대해서만 이상한 시선을 보낼 뿐일까?


나와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는?

나와 다른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나와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은?

나와 다른 얼굴색을 가진 사람은?

나보다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람은?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나보다 뚱뚱한 사람에게는?


내가 만약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다면 나의 종교는? 거의 99퍼센트 이슬람교 수니파였을 것이다.

그럼 나의 정치적 성향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그렇게 타고나서 환경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다. 내 종교적 믿음만이 절대적이고 나의 정치적 신념이 가장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떠들어댈 수 없다. 내가 한 것이 별로 없으니 자신에 대해 겸손하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 낳고 이렇게 서로 다르게 생겨먹었다. 자기 확신에 찬 인간은 늘 자신은 맞고 상대방을 토착 왜구나 빨갱이로 만든다. 우리 의식 안에 파시즘이 아직도 똬리를 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서로 달라야 자연환경의 변화에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정치적, 경제적, 실존적으로 생각이 달라야 한다. 다양성이 자연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나와 다르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다.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축복해야 할 일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 <채식주의자>를 다시 생각한다.

한국 소설 최초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을 받은 작품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처음에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가부장제의 폭력에 대한 고발인가’라고 생각했지만, 3부를 다 읽고는 메시지가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것을 벗어나 이탈하였을 때 사회적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어 광인으로 취급한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에게 ‘미친놈’이라고 찍어내려 사회에서 아예 보이지 않도록 소외시킨다. 소설의 주인공인 영혜가 채식주의가 되면서 집안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회를 고발하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그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의 다양성은 인류가 결코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 생존 방식이다. 인간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사회가 인정하고 추구하는 가치도 다양해야 한다.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면 우리의 능력에 대한 평가도 다양해질 것이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타고나면서 다르게 생겨 먹었고, 또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는 그런 귀한 존재이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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