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시간
나이가 들어서였을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을까? 어느 순간, 내 삶을 글로 쓰고 싶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그것은 읽기에서 시작되었다.
아주 오래전, 함석헌이 쓴 <간디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진솔한 글에 감동했다. 그때 어슴프레 생각했다. 나도 이렇게 솔직하게 나의 삶을 쓰고 싶었다. 세월은 후딱 지났지만 그때의 생각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나의 독서 습관은 시작되었다. 읽기와 쓰기는 한 몸이라고 했지만 난 쉽게 읽기에서 글쓰기로 넘어오지 않았다.
글쓰기 목적은 분명했지만 막상 노트북을 앞에 두고 쓸려고 하는데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어느 유명 작가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내 이야기’를 쓰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하며 헤매던 때처럼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지 몰랐다. 엉클어 있던 기억의 실타래를 풀려면 그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그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이 있는데 그 정도는 쓸 수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어린 날의 기억이 떠 오른 순으로 쓰기로 했다. 이건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린다”를 썼다.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입학식에서 줄을 써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지루하게 기다리던 생각이 났다. 기억의 흐름에 따라 간헐적으로 생각나는 에피소드를 떠 올리면서 쓸 수 있었다.
석 달을 매일 책상에 앉아 쓰고 난 후 인쇄를 하여 읽어 보았다. 마치 시험 채점을 하듯이 처음부터 쭉 읽어갔다. 기억과 의식의 흐름대로 썼기 때문에 무엇을 얘기하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전혀 없다. 내가 살아온 기억을 더듬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나만을 위한 글이다. 글을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는 전혀 메시지가 없는 남이 쓴 의미 없는 일기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구나.
자신만이 간직하는 일기가 아니라면 글은 독자와 소통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독자는 시간을 내어 글을 읽을 때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재미가 있거나 혹은 감동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공감하기를 원할 것이다.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거나 내가 경험한 공감할 수 있는 얘깃거리를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걷기와 메모’였다. 동네 근처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 산행을 하고 내려와 호숫가를 걷고 벤치에 앉아 쉬면서 ‘이야기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산행, 산책 그리고 앉아서 쉼’이라는 루틴이 반복되면서 의식 깊숙이 있던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의 석 달을 매일 아침, 산책 후에 책상에 앉아 썼다. 제목도 <내 삶의 흔적>으로 하여 흔적을 찾으러 매일 썼다. 마침 학교에서 연구년을 받았기 때문에 방해받는 것 없이 이 루틴이 가능했다.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금방 떠오른 참신한 생각도 금방 잊어버려서 찾은 방법이었다. 메모가 쌓여 나가면서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고 한 매듭을 짓고 새롭게 다시 나아가기를 소망했다. 기억을 더듬어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남기기를 원했다. 은퇴한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했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뭔가 하나를 얻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하는 모습을 눈으로 그려본다. 사소하지만 행복한 순간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글쓰기를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결국 나 자신을 더 알아가고 나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기를 희망한다. 나는 누구인가? 새삼스레 묻는다.
사회에서는 교수,
가정에서는 두 딸의 아빠,
한 여인의 오래된 남편,
처가에서는 사위,
그리고,
무엇으로 나를 더 설명할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해야 직성이 풀리는 약간의 강박증을 갖고.
겉으로는 느긋하게 보이지만 마음속은 늘 남의 말에 흔들리는,
가볍게 살고 싶지만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끊이지 않는,
해야만 하는 일에는 책임감을 갖고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아직도 찾고 있는
남과의 시간은 잘 지키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은 쉽게 생각하는,
꽃을 가꾸고 작은 포켓 정원이라도 만들고 싶지만 지금 집에 있는 화분도 돌보지 않는,
언젠가 작은 정원을 가꿀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을 갖기를 꿈만 꾸는,
아내의 조그만 잔소리에도 삐쳐 하루 종일 인상 쓰고,
이렇게 소심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난,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왜 작가가 되고 싶은가?
작가(作家)란 말 그대로 ‘집’을 짓는 사람이다. 여기서 ‘집’이란 자신만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난 지금 집이 아니라 글로써 나만의 세계를 짓고 있으니 이미 작가인 것이다. 집을 짓던 밥을 짓던, 농사를 짓던, 글을 짓던, 그림을 그리던 무언가를 만들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은 모두 작가이다. 하지만 그냥 만들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집을 지으면서 대충 얼렁뚱땅 만들어서는 금방 무너진다.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한다. 글도 글감과 주제 구상, 첫 문장의 선택 등 상당한 고민과 진통을 겪어야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정성을 다해 글을 짓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면서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세계를 만든다.
다시 작가를 정의한다.
작가란 정성을 다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제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브런치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처음 ‘브런치 작가’라는 말이 다소 부담스럽고 어색하게 들렸다. ‘내가 작가라니?’하고 말이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지 않았다고 작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누구나 글 쓰는 작가라고 떠들어 댄다고 출판계가 퇴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환영해야 할 현상이다.
매일 글을 쓰고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좋은 창작을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쌓여 나가고 출판 시장은 확장된다. 지금은 자신 있게 ‘작가’라고 얘기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직 좋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만 매일 쓰면서 더 좋은 작가로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지금 이 순간,
네덜란드, 로테르담 중앙역 근처 어느 아파트의 부엌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밖의 경치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 아내와 딸은 외출하고 없고, 혼자 청승맞게 앉아서 노트북을 보면서,
‘작가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작가라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니까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