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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Aug 25. 2023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

다시, 나답게 산다는 것은?

장남답게 

장녀답게     


남자답게

여자답게     


아들답게

딸   답게    

 

고흐처럼

고갱처럼     


누구답게도 살고 싶지 않아

누구처럼도 살고 싶지 않아   

  

그냥 나답게 살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

지금 이 기쁨을     


생명의 기쁨 느끼며

온몸으로 표현할 때   

  

보이지 않는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울 때

그 자유라는 형벌 앞에서 기꺼이 책임질 때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


지난번에 쓴 글 <나답게 산다는 것>을 다시 가져온다.

한번 더 다짐하기 위해서다.


AI 생성기인 ‘뤼튼(wrtn)’으로 생성된 일러스트


‘나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YOLO – You Only Live Once’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즐기면서 살아보자’는 말이 한 때 유행했다. 


한차례 매스컴을 통해 빠르게 전파된 적이 있었다. 2015년 미국 대통령이던 오바마가 전 국민의 국민의료보험 가입 의무화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에서 “욜로 맨”이라 하여 “한번 사는 인생 후회 없이 살아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미권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 조금 뉘앙스가 다르게 쓰고 있다. 무모한 도전이나 과소비만 하고 겉멋과 허세가 가득한 ‘생각 없이 사는 놈팽이’로 치부하면서 조롱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오히려 나는 ‘카르페 디엠’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로마시대의 시인인 호라티우스의 시 구절 가운데 라틴어로 쓴 ‘카르페 디엠’이 있다. 번역하면 ‘이 순간을 잡아라’. 앞 뒤 시구의 문맥을 보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인생의 시간은 우릴 시기하면서 흐른다네. 현재를 잡아라, 미래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해두고”라고 연결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Keating 선생 역으로 나온 로빈 윌리엄스가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하게 만들어라”라고 말하면서 더 유명하게 되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남들이 정해주는 삶이 아닌, 이 세상에 자신만의 하나밖에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동전의 앞면에 카르페 디엠이 있다면 그 뒷면에는 다음의 말이 있을 것이다.   

  

‘메멘토 모리’이다. 


AI 생성기인 ‘뤼튼(wrtn)’으로 생성된 일러스트 - '메멘토 모리'를 상징


‘너의 죽음을 반드시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교만하지 말고 모든 사람은 죽게 되어 있으니 인생을 겸손하게 살라는 교훈을 준다. 


특히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자기 전성기의 직위인 “전 회장, 전 국회의원, 전 총장, 전 장군”을 강조하고, 그렇게 주위에서 불러 주기를 원한다. 모두 전성기의 직위 외에는 현재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것이 없는 것이다. 현재 꿈이 없다면 거세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백하는 형국이다.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을 갖고 책을 통해 탐구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봉사활동을 찾아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만이 인생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현재 내가 무엇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왕년에 무슨 직책과 직위를 가졌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과거 직책은 의미가 없다.


우리 세대는 은퇴를 하고 직책과 직위가 없어지고 교환할 명함이 없는 순간 당황하고 허탈한 느낌을 받는다. 그동안 자기의 정체성을 직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수는 조금 특이하다. 대학에서는 ‘명예교수’라는 직위를 부여하여 은퇴 후에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도 잘난 척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겸손하게 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명예롭게 여생을 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타이틀일 것이다. 결코 잘나서 주는 것이 아니다.     


‘명예교수’ 직함이 없다고 한들 어떠랴?


 자신이 스스로 명예롭게 개인의 성장과 사회 발전을 위해 여생을 살아간다면 명예로운 삶이 아닐까? 지금 가장 명예롭게 명예교수 활동을 하는 분이 있다.    

 

올해 103세인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지금도 외부 강연과 책과 칼럼을 쓰면서 사회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그분은 ‘본인이 살아보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자신이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사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면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격하게 공감하고 싶은 말이다.


신체적인 성장은 20대 중반에 끝이 나고 40대가 되면 성인병이 나타나고 스스로 늙는다는 것은 느낀다. 그러나 정신적인 성장은 그 이상의 세월을 살아야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100세 이상을 살아온 철학자가 하는 말씀이고 내 나이가 60을 넘어가는 때라 더욱 마음에 다가왔다. 몇 년 전, 겨우 60을 넘긴 시점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 

     

‘끝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내가 환갑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에 관한 생각 그리고 가족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철학교수님의 말 대로 ‘지금부터 시작이야!’라고 말이다.     


그러나 60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나도 희망을 가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행복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처음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2018년 6월경이었다. 60을 코 앞에 둔 시간이었다. 그즈음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는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제일 먼저 나에 관한 글이었다. 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글로 썼다. 그렇게 쓴 글을 스스로 읽는 과정에서 내 삶이 조금은 명료하게 다가왔다. 글을 쓸수록 희미하게만 보이던 과거의 사건과 생각들이 또렷하게 보이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손에 잡으면 잡힐듯한 오묘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평범한 한 인간의 얘기였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떨어져 고통 속에 살아왔지만 가끔은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글로 써 내려갔다. 글을 완성하고 책으로 출간하면서, 


‘늦었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효능감이 생겼다.      


앞으로 더 공부하고 얼마 남지 않는 은퇴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고 싶다. 은퇴 후에도 호기심을 가지면서 책 보고 글 쓰는 시간을 더 가지고 싶다. 나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인 캘리그래피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 은퇴 후에는 지금까지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다시 환원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나됨은 99% 이상이 타인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떻게 봉사할지는 더 고민해야 한다.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곳에 내가 가진 능력을 사용했으면 좋겠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일에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다. 어떤 사람은 60세가 넘으면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건강은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물론 건강해야 한다. 건강을 잃으면 정신도 함께 쇠잔해진다. 하지만 건강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온 에너지를 쏟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활발한 생활과 정신활동을 위해 건강이 필요하지, 건강 그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매일 스포츠 센터에서 하루 종일 운동만 하고 일과를 보내는 사람을 보면 “왜 건강해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한다. 그럴 때,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그림이 그려지면서 오늘의 삶이 더욱 풍성해진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 속, 브룩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약 50년의 형기를 지나칠 때 즈음, 가석방을 받아 사회에 나왔다. 하지만 직장에서 일하면서 소변을 보는 것까지도 상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오줌을 눌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오랫동안 감옥소에서 길들여진 습관이 자신의 정신을 지배한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감옥소에 갇힌 슬픈 영혼이었다.      


영화 속의 브룩스가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현대를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가?      


오랜 사회생활 속에서 습관의 노예가 되면서 정신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면서 욕망의 노예로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한 후,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고 세월만 탓한다면 어떻게 될까. 젊으나 늙을 때나 희망을 잃고 스스로 습관의 노예가 되어 삶을 개척하지 않는 것은 죽음과 같은 삶이다.    

  

마샤 메데이로스의 시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을 다시 생각한다.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옷 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열정을 피하는 사람

흑백의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을 반짝이게 하고

하품을 미소로 바꾸고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보다

분명히 구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을 때

상황을 역전시키지 않는 사람

꿈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과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그곳을 에고로 채운 사람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묻지도 않고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우리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늘 기억하면서     

오직 불타는 인내심만이 

멋진 행복을 얻게 할 것이다  



[글 대문의 배경그림은 AI 생성기인 ‘뤼튼(wrtn)’으로 생성된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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