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로 돌아가야 하지
1999년 봄, 마흔 살 영호는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에 허름한 행색으로 나타난다. 그곳은 20년 전 첫사랑 순임과 소풍을 왔던 곳.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고, 삶의 막장에 다다른 영호는 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한다. 영호의 절규는 기차의 기적소리를 뚫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흘 전 봄, 94년 여름, 87년 봄, 84년 가을, 80년 5월 그리고 마지막 79년 가을. 마침내, 영호는 스무 살 첫사랑 순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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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우연치 않은 기회로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박하사탕>을 봤다. 20대 중반이면 재미없을 것이라던 주위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나는 영화를 보고 별점 다섯 개를 주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영화임은 알고 있었지만 영화 내용까지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다. 워낙에 내가 태어난 연도에 개봉하기도 했고 오래된 영화여서 텔레비전이나 각종 영상에서 밈으로만 많이 쓰이는 영화라고 인식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각종 부조리와 영호의 점점 변질되고 안 좋게 변화하는 모습이 강조되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인생을 예고 없이 송두리째 삼킨 느낌이었다. 물론 물고문을 하고 분식집 종업원의 엉덩이를 더듬는 타락한 영호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수했던 영호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꽃을 찍기 좋아했던 그저 순박했던 영혼을 알고 있기에... 이야기가 과거로 역순으로 가면서 안타까움만 들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영호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만일 돌아가려 한다면 처음 대학교 신입생 모임회 때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갈 곳을 찾는 영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있으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교라는 좋은 울타리를 벗어나 취준생이 된다. 나 스스로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취직은 어렵고 방학을 맞아해 보려던 인턴도 족족 다 떨어졌다. 나는 작은 일에 쉽게 절망하고 큰 일에는 무너진다. 타고난 선천적 기질과 기민함도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무너지고 엄마 품에 기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중학생 때? 아니면 고등학생 때? 돌아갈 곳이 없다. 영호처럼 긴 인생을 산 것도 민주화의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로 큰 일을 겪은 것도 아니었지만 아쉽게도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픈 시간 때가 없다. 중학생 때는 날고기는 아이들 가운데 계획표를 철두철미하게 짜서 공부를 하는 모범생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모범생에서 조금 많이 벗어나 학교 종이 치는 데도 가지 않고 나 혼자 탄천을 거닐면서 중간고사가 꽃말이라는 벚꽃을 마음껏 여유롭게 즐겼다. 이는 고등학교 때 입시 스트레스가 너무 심각하게 와 병으로 나타났고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한 일이었다.
한 것 없이 본인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영호의 심정도 이랬을까? 사실 내 눈에는 영호가 그렇게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보인 적이 없다. 바람피운 자신의 아내는 그렇게 때리면서 자신은 차 안에서 비서와 잠자리를 나눈다. 이게 영호 탓만이 아닐 것이다. <박하사탕>에는 현대사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를 피해자라고도 칭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생각도 했다. 누군가가 어른이 되는 과정은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데에 기반한다고. 영화에서 주려는 메시지 중 하나가 그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떨어지는 벼락을 막을 수 없고 옛말에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날벼락들을 맞으면서 남을 돌보는 어른이라는 게 되어가는 게 아닐까 싶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으로 날벼락같은 일들이 생기고 체력이 모자라면 쉽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요즘 보는 세상 속의 사람들은 영화 속보다 말도 안 되고 더 기상천외한 날벼락을 맞으면서 일상을 유지하고 있더라. 오늘도 날벼락을 맞은 당신께 심심한 위로의 말 전하고 싶다. 영화에도 일상에도 사랑은 있다고. 조금 뜬금없을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이런 입체적인 인물을 그려내신 이창동 감독님 너무 질투가 나지만 그냥 영화만 보고 좋아하려고 한다. 나는 나만의 것을 써야지.
오늘도 일상을 살아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