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키'를 통해 그를 추억하다
(사진: 영화 재키 스틸샷)
1.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존 케네디와 그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일명 재키) 모두 금수저 집안 출신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옷을 스스로 빨았다던지, 빤 옷을 게 본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케네디의 부친은 2차 세계 대전 직전 주영 미국대사를 지냈는데 그 덕에 당시 하버드 생이던 케네디는 유럽 유명 정치인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는 또래 누구보다 깊고 넓은 정치적 시각을 갖게 하는데 기여했다. 뭐 본인의 능력이 뛰워난 점도 있었겠지만- 금수저 집안이 아니었다면 가질 수 없었을 만남이 당연하고 그 만남들을 통해 가지게 된 식견 또한 불가능했을 거다,
2. 금수저 집안 덕분에 케네디는 선거자금 모금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었다. 아들을 꼭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 케네디는 그가 돈 걱정 안 하고 선고 운동할 수 있도록 모든 자금적 노력을 다해주었다. 꼬맹이 시절부터 재정적 압박에서 자유로웠던 케네디는, 하고 싶은 공부 하고, 놀고 싶을 때 놀고, 데이트하고 싶을 때 마음껏 데이트하고, 여행하고 싶을 때 마음껏 여행하는- 전형적인 금수저 집안의 아들의 인생을 마음껏 누렸다.
3. 케네디가 금수저적인 삶의 궤적만 그렸다면- 대통령이 물론이거니와 상원의원에 당선될 수도 없었을 거다. 터프한 보스턴 정치판에서 서른이 갓 된, '을'의 입장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그저 학벌 좋고 (하버드 정치학) 돈 많은 집안에 반반히 생긴 청년이 선거에 뛰어들었다면 필패가 당연하지만- 케네디에게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원했을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었다.
그건 케네디가 해군 장교로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경력이었다. 조국이 전쟁을 벌일 때- 꼼수를 부렸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을 그는 피하지 않았는데 케네디의 참전에는 그의 두 살 위 형 조 케네디의 영향도 있었다. 동생 케네디보다 건강했고, 동생만큼, 혹은 더 똑똑했던 하버드 선배이기도 했던 조 케네디는 종전을 1년 앞둔 1944년, 공습을 위해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조종하다 폭탄 오작동으로 인한 폭발로 공중 산화한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4. 존 케네디도 전쟁에서 죽을 뻔하다 살았다. 그가 함장으로 있던 어뢰정이 일본 구축함 기뢰에 의해 공격을 받고 침몰하자 바다에 빠진 부하를 10km가 넘는 거리에 있는 무인도로 수영을 통해 구출해 냈다. 이 일로 집도 잘 사는데 얼굴도 잘 생기고 거기다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가 죽다 살아난, 그리고 부하들의 목숨도 건진- 도깨비 신 공유와 비교해도 모자랄 것 없는 이 극적인 스토리에 케네디는 단번에 훌륭한 차세대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그 명성을 발판 삼아 그는 정치계에 입문한다. 그의 나이 딱 만 30세 때의 일이다.
5. 케네디는 자기가 누리는 부와, 그 부 덕분에 이룬 자신의 학업적 성취를 (하버드대 정치학 졸업) 자신의 능력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존재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그 공동체에 속해 있었기에 자신의 성취가 가능했다”란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막대한 부로 인해 누리는 일상의 편안함이 자기가 부모를 잘 만나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혹은 잘 사는 부모를 잘 만난 자신의 능력 덕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하고 뒷받침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여기서 머릿속 떠오르는 이가 있다. 바로 '코너링'이 좋아 서울경찰청 '꽃보직'에 당첨됐다는 어느 전직 민정수석의 아드님이다. 케네디만큼이나 집안의 권력과 부를 동시에 누렸을 그가- 만약 케네디 평전을 읽었더라면 '코너링'이 아무리 좋았어도, 혹은 그 코너링에 감복한 경찰간부가 운전병을 추천했더라도- 고사하지 않았을까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아.. 그리고 피부병 때문에 군대 안 가셨다는 '그분'도...... 얼굴 피부는 좋아 보이시던데...)
6. 1963년 케네디가 만 47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은 후, 재키는 5년 후 그리스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혼한다. 그리고 이름도 두 번째 남편 성을 따른다. 1975년 이혼 소송 과정 중 오나시스가 사망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에도 Ms. Onassis 이름 그대로 썼는데 아마도 그를 추모하는 마음 때문 아니었을까? 며칠 전 뉴욕타임즈에서 재키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바로 그녀가 오나시스와 결혼하기 직전 썸을 타던 전 주미 영국대사에게 쓴 편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수적 관점에선 전 남편이 -그것도 대통령이었던 - 사망한 지 5년 만에 재혼한 것도 놀라운데- 재혼남외에도 썸 타던 남자가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만 34세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을까?
7. 그녀에게 빠졌던 이는 데이빗 고어였는데 주미영국대사 시절 존 케네디와도 외교정책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던 막역한 사이였다. 케네디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던 존 케네디 동생 로버트 케네디 (그 또한 68년에 경선 유세중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에 따르면 형 케네디는 그 누구보다 데이빗의 정책 의견을 원했다고. 데이빗은 1967년에 부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에 재키에게 청혼을 하려 했는데 재키는 그와 결혼할 수 없다며 그 이유를 밝힌 편지가 최근에 공개됐다. 편지를 보면 재키가 얼마만큼 정치판을 떠나고 싶었는지 느껴진다.
“If ever I can find some healing and some comfort — it has to be with somebody who is not part of all my world of past and pain,”
(제가 누군가에게 평온과 힐링을 얻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제 과거와 과거 속 고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이어야 해요.)
8. 재키가 데이빗의 청혼 요청을 거절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 로버트 케네디의 죽음도 관련 있어 보인다. 암살로 동생 케네디 또한 목숨을 잃자 재키는 더욱더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갈구했다는 것. 그 영향으로 정치와 전혀 관계없는 그리스 선박왕에게 - 삶의 평온을 얻기 위해 두 번째 결혼을 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9. 데이빗은 1985년 그의 전 아내처럼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재키는 그의 장례식에 나타났다고 한다. 9년 후인 1994년 암 투병 중 재키는 65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10. 케네디 가문의 저주라는 말은 케네디가 일가에서 비극적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가 많아서 나온 말이다. 우선 전쟁 참전 중 산화한 장난 조 케네디에 이어- 총탄에 목숨을 잃은 존과 로버트 케네디가 있다.
그리고 존 케네디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의 여동생 캐슬린도 1948 년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한 가족에서 4명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 비극은 그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는데 케네디의 아들 존 케네디 주니어가 1999년 삼촌 로버트 케네디 딸의 결혼식을 가기 위해 자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너던 중 추락사고로 부인과 함께 사망한다. 두 명의 시신 모두 찾지 못했다. 비극에서 자유로운 케네디 일가 중 한 명인 케네디 대통령의 장녀 케럴라인 케네디는 오바마 정부에서 4년 간 주일대사를 역임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 대사직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2. 영화 재키에서 (영화 감상평을 쓰려고 했는데 영화 관련된 내용은 이 한 줄이 전부;;;) 인상 깊었던 대사 중 하나는 재키가 남편 케네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자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 나왔다.
Of course he wasn't naive, but he was ideal.
물론 그는 순진한 정치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