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시퀀스의 셔플이 낳은 최악의 지루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3월 1일. 민족운동이 일어난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날에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고 영화를 보러 롯데시네마 9시 표의 해빙을 보러 갔다. 어머니의 들뜬, 기대감에 부응해 아버지가 보자던 <재심>을 뒤에 놓고 선택한 영화는 <해빙>이었다. 조진웅의 압도적인 눈빛과 풍채에서 나오는 듬직함이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조진웅의 연기는 익히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선택한 영화가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다 숭고하고 값진 역사의 오늘에 있어 나에게 이 선택의 시간이 충분한 값어치가 되게끔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믿음은 언제나 그렇듯 양날의 검과 같음을 다시금 느낀다. 영화 <해빙>은 나의 믿음과 어머니의 기대와 흥분조차 산산조각을 내버린 영화가 아닐까 싶다. 진정한 오늘의 승리자는 <재심>을 보자고 하시던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해빙>은 앞전에 펼친 마케팅의 효과와는 달리 프로덕트, 즉. 제품이 이상한 상황에 놓여 마케팅 전반의 과정적 절차가 무너지는 영화가 되겠다.
수많은 마케팅에 비해 작품은 실망 그 자체였다. 마치 영화의 제목 그대로, 눈이 녹았기에 모든 것이 들춰지는 것처럼. 이 영화가 개봉함에 따라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들춰진다. 물론 긍정적이지 않은 쪽으로 들춰진다. 정말 긍정적이지 못하다.
영화의 시작은 버스에서 목적지를 향해가는 승훈역의 조진웅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병원에 도착한 승훈은 내시경 검사를 하며, 강남역 일대에서 벗어난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 퍼져있는 미제 사건인 연쇄살인사건을 접한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모습을 가지는 승훈은 정육점을 운영하는 집주인 할아버지의 웅얼거림에서 무언가를 느낀다. 이후 찜찜함을 느낀 승훈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기존의 살인사건과 더불어 새로운 살인사건의 연속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승훈을 주인공으로 보고 그가 바라보는 관점이 곧 영화의 시선이 되리라 보았다. 프로타니고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역할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관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릴러의 경우는 보통 대비가 명확하게 자리한 인물관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집중과 몰입을 야기하여 극의 진행에서 극적 연출이 가능해지는 것이 스릴러가 가지는 모습이었다.
즉, 관객은 인물에 집중이 될수록 상황에 대한 추론과 결과를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빙>은 안타깝게도 인물들에 대한 몰입이 현저히 뒤처졌다. 이 인물이 왜 불안에 떠는지, 왜 불안을 해소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연출적 장치는 손쉽게 찾아내질 못했다. 영화 <해빙>의 지루함의 시작은 연출적 장치가 전혀 없는, 인물들의 불명확한 행동들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었다.
스릴러는 보통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연출적 장치가 하나 둘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보통 이를 두고 '떡밥'이라고 말하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떨어진 '떡밥'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달리면서 회수되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연출의 효과에 우리는 '반전', '놀라움'으로 표현한다. 즉, 뿌려진 떡밥을 잘 회수만 해도 본전으로 가는 장르가 스릴러라는 점이다.
<해빙>은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극 중에 뿌려지는 떡밥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없다', 극 중 몇몇의 장면에서 '보일러'를 시작으로 '거울'과 '화장실', '주사실', '진료실'을 통해 장면과, 공간에 따른 모순되는 상황과 연결 떡밥을 던져놓긴 했지만, 이야기의 설명을 다 풀어주는 영화의 후반부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아차리기 힘든 부분이 많다. 이런 숨은 그림 찾기 식의 연출과정이 영화 <해빙>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납득이 도저히 어려워지는 요소 중 하나다. 시퀀스의 셔플이 낳은 최악의 수가 아닐까 싶다.
지루할 정도로 승훈의 개입이 없는 상황이 언제 뿌려졌는지도 모를 떡밥이 맞닥뜨리게 되면서 영화는 중후반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화의 풀이가 시작된다. 풀이가 시작되면서 하나 알 수 있는 바는 <해빙>은 승훈의 모습이 영화를 풀어가는 관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승훈 자기 자신이 생각한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초중반까지 불안에 떠는 승훈의 모습이 중후반에 이르러 타인에 의해 무서울 정도로 침착함을 보이는데. 이 과정은 개인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은 꽤 좋은 연출이라 여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극을 완성시킨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지극히 연기자인 조진웅의 힘이 폭발하는 장면이 되는 것이지 영화의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후반의 풀이과정에서 승훈의 침착함이 타인에게 비칠 때 <해빙>은 스토리 중심의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치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즉,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 이야기의 개연성을 맞추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을 때 승훈의 침착함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 감독이 설명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얼추 알 수 있게 된다. 이쯤 되면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이 뒤통수는 참신한 바가 아니라 얼토당토않은 황당함이 크게 느껴진다.
그렇다. 엘리트로 불리는 의사가 겪은 남모를 현실적인 고충이 후반부에서 드러나면서, 의사라도 똑같은 사람의 현실의 고충과 함께 추락하여 추악한 현실을 회피하려고자 하는 방어기제를 승훈의 모습을 빌려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의사라도 추악한 현실을 맞이한 상황에서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고. 우울증이 만들어낸 불면증을 프로포폴이라는 약을 통해 회피하려고 한 승훈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택이 낳은 최악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킴에 따라 자기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아내의 죽음을 자신의 몫으로 만들어야 했다. 최악의 상황을 자신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의도하게 되었고 인간이 가지는 심연의 나락으로 스스로 떨어지고 말았다.
초중반까지의 지루한 시퀀스의 셔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승훈이라는 인물의 관점이 영화의 주된 방향성이라고 여길 이들이 많기에, 오히려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내면 심리의 연출과정이 "왜?"라는 이유를 묻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사료된다. 자신의 처지와 방향성에 대해 깊게 고찰해보고자 하여 관객들을 끌어오려고 하지만, 결국은 관객도 영화를 보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 할 뿐, 극의 인물들의 입장을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패착 요인은 바로 여기 있다. 추락한 추악한 이들의 모습을 비춰내면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인물 간의 내면적 구도를 만들어서 관객을 새로운 연출로의 초대를 했지만, 관객은 인물의 내면성보다 스토리를 원했다. 영화의 인물들의 묘사를 통해 내면적인 불안감을 돌이켜보게 만들고 싶었겠지만, 불안해진 것은 오히려 영화 <해빙>이 되었다. 이 원인은 납득할만한 이야기와 설명이 제시되지 않은 채 관객에게 이런 내면성을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부분이 후반부에 짙게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솔직하게 이 과정은 정말 지루함을 넘어서 납득이 안될 지루함이었다.
시퀀스를 새롭게 섞어가며 연출을 선보이는 것은 좋으나 납득되지 못한 설명의 부재는 굉장히 뼈저리다. 떡밥이 풀리지도 않은 채 풀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남은 것은 감독이 의도한 인간의 내면적 심리의 불안이 아닌 조진웅의 연기였다. 하지만 조진웅의 열연도 이 영화의 지루함을 막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