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란 +의 값을 갖는 상수가 포함된 함수인가?
내가 미국에서 온 안과 전문의를 처음 만난 곳은 안과 진료실이 아니라 김포공항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모범택시 뒷자리에서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미국에서 안과 전문의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친척 어른께서 자신이 모셨던 은사님이 한국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여 나의 어머니가 큰 도움을 드렸던 여름방학이 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짧은 영어를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이야기를 했는데, 정확히 어떤 경로로 그 주제까지 대화가 이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은 지'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가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게 된다면, 너는 모든 기술을 써서 영원히 살고 싶은가?'에 대해 물었고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Of course'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사람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며 나에게 사과했다.
당시 내가 기록해두었던 일기장을 확인해보면, 그 날의 나는 그의 발언에 대해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살아있는 이상 죽는 일이 언젠가 온다는 것은 이미 아는 나이였고, 반 주입식으로 주변에서 가르쳤던 것처럼 ‘삶과 죽음’을 ‘선과 악’처럼 매우 뚜렷하게 이분이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게 천진난만했고, ‘행복한 삶이 쭉 이어질 거다’ 같은 장밋빛 전망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행운이 나와 함께했던 덕분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 단언컨대, 살면서 그때까지 개인적으로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그룹에 속할 - 그가 삶이 우울할 수 있고, 일찍 끝내고 싶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을 꺼낸 것이다. '사람이 산다면 오래 쭉 살면 좋지, 진심으로 일찍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게다가 그는 정말로 이룬 것 많고 가진 것 많은 사람인데?’
그는 지혜로웠으며 성실한 어른이었다.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하면서 살고 있었던 시기였음에도, 수면시간이나 일일 공부량 모두 그의 습관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의 판단에, 그처럼 가진 지식이 누구보다도 많았을 사람이 말한 ‘삶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은 대상이 될 수도 있다.’와 같은 발언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년을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주변에서 듣고 배웠던 ‘삶’ 이란 대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왜 주어진 것인지 이유가 막연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었다.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든, 부모님이 아이에게 선물한 것이든, ‘선물 받은’ 무언가 좋은 것이라고 다들 말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선물로 나쁜 것을 줄 리가 없으니, 이러한 걸 무턱대고 건네받은 어린 사람 입장에서는 이를 잘 이어가면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같이 받는다 – 나는 이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러한 삶을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끝낼 수가 있는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자, 어떤 사람에게는 ‘삶이란 게 그렇게까지 무거운 가치를 가진 건 아닌 걸로 보이나 보다’ 하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고, 이어서 ‘그렇다면 삶의 가치라는 게 얼마나 큰 것인가? 우리가 막연하게 가치가 있다고 전제부터 하고 다음 것들을 판단했던 것과 다르게, 삶의 가치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근거 없는 주장뿐인 문장인 것이었던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의심에 대한 좋은 답을 오랫동안 낼 수 없었다. 먼 사람이라면 말을 꺼내기 쉽지 않겠거니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잘 입이 떨어지지 않는 주제였다. 경험상 일부는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는 듯이 경악하기까지 해서, 말 한마디에 서먹서먹해진 사이를 다시 메꾸는 데 애를 많이 먹은 일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가 배우고 목격할 수 있었던 두 가지는
첫째, 자신의 삶이 가치를 잃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다는 깨달음과
둘째, 가치가 – 로 음의 값을 보인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삶을 그만둘 수 있으며, 이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탄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의 일이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 나와 나이 차가 두 살 나는 친한 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가 상당히 좋은 특목고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문자를 보낸 지 몇 달 안 된 여름, 그는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숨졌다. 기말시험 중 중요한 과목 몇 가지를 망친 일에 대해 심한 자책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맨 처음 겪은 주변의 자살 소식이었다.
고2, 1학기, 2학기
고3, 1학기, 2학기, 수학능력시험, 논술과 면접, 대학 합격 발표
굉장히 길게 느껴지는 10대의 몇 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의 가치가 스스로의 석차에 반비례하여 평가되는 상황들을 아주 많이 경험했다. 학생의 본분이 학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인정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태어나서 그동안 해 온 일이라고는 대부분이 공부였으니까. 인정하기 싫더라도 인생 누적 경험 시간의 8할이 공부랑 관련된 것들에 쓰였다면 내 삶의 가치가 곧 공부 성취도에 좌우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웠던 거다.
중간, 기말고사 시즌이나 모의고사 시즌이 끝난 다음 1-2주 안에 누군가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주변 여고를 다니는 누구누구의 친구다. 누구의 누나다, 형이다, 동생이다.
대한민국 중고등학생 중 공부 외길 이외에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고 나는 느낀다. 외길로 정해진 일을 무작정 진행하다가, 목표한 것이 좌절되거나 스스로가 낙오했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면 그 즉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자신의 삶의 가치가 부정당해버렸다’ 고 느끼는 것을 ‘네가 너무 감정적인 거야’라고 손쉽게 퉁쳐버릴 수 있는 것일까?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만 학교, 학원 등지에서 5건 정도 되는 자살기도자의 소식을 접했다.
그중 죄를 지어서 - 예를 들자면, 커닝하다 걸린 것이 있거나, 범죄를 저질렀다가 도망 다니는 와중에 겁쟁이처럼 죽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없었다.
나의 경우에는 모든 소식이 시험기간들과 연결되어있었으며, 사망한 학생들이 받았다는 나쁜 성적은 그 자체로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전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악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받은 상처가 허구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들은 삶의 가치가 0이나 그 이하라는 판단을 얻은 다음 더 살아가야 할 좋은 이유를 못 찾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었다.
죄를 짓고 도망가다가 죽은 사람의 일이라면 (항상 올바른 태도는 아니겠으나) 고소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나쁜 사람에 대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없이 속상한 일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죽음이 그들에게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판단 하에 일찍 중단된 삶 앞에서, '성서에서 말하길 자살은 죄악이라고 했다' 같은 말로 그들을 비난하는 태도가 정말로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가 삶의 가치를 음의 값으로 인식하는 순간이 분명 올 수 있을 것이다.
음의 가치를 갖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포기하고자 하는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설명을 조리 있게 잘해 줄 수 있다면. 어떠한 형태의 창피든, 모욕이든, 실패를 겪는 일이 있더라도, ‘이래서 삶은 기본적으로 살아야 좋은 가치를 갖는다’라고 누구라도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다면 평범하게 자기 공부해 오던 동년배 학생들이 일찍 죽는 일이 조금이라도 덜어지지 않았을까? 설득력 크게 없는 ‘신이 주신 삶이다’ 이렇게 무턱대고 들이대는 명제들 대신에 말이다.
몇 년 후, 음의 값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삶이 나에게 직접 해를 끼치려는 순간이 대학교에서 찾아왔다.
좋든 싫든,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않고서는 내가 날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 이어질 순간이 온 것이다.
나와 이야기했던 그 선생님의 이름 - ****s ******h, M.D., M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