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란 +의 값을 갖는 상수가 포함된 함수인가?
내가 다닌 학과에서는 본과 1년 - 2년 기간 사이에 실험동물 관련 이론과 실습을 반드시 이수했어야 했다.
커리큘럼 상 산업동물 실습, 즉 육류나 유제품 생산을 위해 키워지는 동물에 대한 것들을 배운 다음 실험동물 실습 - 생명체로부터 데이터를 얻는 과정에 대한 실습을 거쳐야만 진급과 더 나아가 졸업이 가능해진다.
산업동물 실습에서는 당연히 육류의 획득에 대한 자세한 사항들을 익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스트레스들을 나는 어떻게 넘겼을까?
예과 2년, 교양수업 생명의료윤리에서 다뤘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육식 vs 채식'이었다.
당시 내가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조사하고 정리해본 결과 '인간은 배아세포 단계부터 완전히 성장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신체 기관들 - 특히 근육과 골격형성에 있어 육류의 섭취가 없이는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 발달을 할 수 없다.‘ 란 결론을 내렸었다. (황 포함하는 아미노산 등, 식물성으로 대체 및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확인했다 – 이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따로 챕터를 만들어서 다루는 편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육류 생산 및 소비는 인간 신체의 한계 상 불가피한 것이고, 이에 대하여 도덕적인 문제를 느낀다면 최대한 산업동물이 공포 속에서 살아가다 죽게 만드는 요인들을 통제해주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 이런 식으로 마음의 정리와 대비를 하고 진행한 결과, 정신적인 대미지를 크게 격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험동물에 관한 일들이 주는 압박감은 너무나 버거웠다.
9월 중순이 넘어가고 10월 단풍이 캠퍼스를 뒤덮었던 풍경이 기억난다.
빠르게 추워져 가는 가을의 3주 동안 나는 주 5일 수업일 중 3-4일 정도를 실습장에 가서 쥐를 죽이거나, 쥐에게 종양 유발세포를 심거나 하면서 보내야만 했다.
와 같은 성격의 실습이었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었겠으나, 이것은 새로운 것을 증명하거나 찾기 위한 대학원생 수준의 연구가 아닌 학부생 수준의 실습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나온 논문과 실험 데이터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이 우리 손으로 실험동물을 여럿 죽여서 나온 데이터를 모아보고 예상했던 것과 합치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성격이 매우 강했었다.
독자에 따라 당시 내 마음 상태에 대하여 공감을 잘 못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크기에 따라 랫드, 마우스로 나뉘어 불리는 실험쥐들이 실험자의 손이 다가올 때마다 뚜렷한 공포심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확신했다.
야생에서 사는 사자가 생존을 위해 잡아먹는 영양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그런 생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잡아먹지 않고서는 스스로가 살아남을 수 없는 신체로 태어난 것이 육식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학부과정 수료와 그 이후의 단계들을 거쳐 가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해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관여했던 한 실험은 50마리 쥐의 골수세포를 필요로 했다. 종양 유발세포 투여는 8마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러한 행동이 별 의미 없는 학살이란 생각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꼈다. 자괴감이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오후 5시를 조금 넘어 노을이 져 가는 모습이 기억난다.
실습장 방향으로 가기 위해 탄 시내버스가 경영대 쪽으로 좌회전을 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른 전공 사람들인 것 같았다.
와 같은 이야기들을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 이외엔 아무도 안 내릴 수의대 정류장에서 내리면, 7층으로 가기 위해 카드키를 몇 번 찍고, 안락사 프로토콜이라고 제시된 – 실험동물윤리위원회의 기준을 따른다 – 사각형 가스 상자에 흰 쥐를 몇 마리 넣은 다음, 포셉과 메스로 털이 복슬복슬한 쥐의 숨을 억지로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가 굳지 못한 몇몇 팀원들이 아예 이 과정은 못하겠다고 선을 그어놨기 때문에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이 조금 더 커져있었다.
같은 걸 생각하면서, 예과 기간 동안 힘써서 참여했던 음악, 문학, 경영학, 법학, 교육학과 연관된 활동들을 떠올려보았다. 어째서 나 혼자 이 버스 안에서, 유일하게 사람으로서 사람이라서 해볼 수 있는 가장 잔인할 일 중 하나에 이토록 밀접하게 가까이 와있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몇 분 안 되어, 힘 조절을 한 번 크게 잘못했다. 꼬리까지 일직선으로 딸려 나오는 무언가를 보았다. 나는 내 삶의 가치가 음의 값을 확실히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살아있지 않았다면 이런 끔찍한 감정을 겪지 않을 거란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웠다.
집, 내 방 문에는 문틀 사이로 설치하는 턱걸이 봉이 있다. 신발장에서 튼튼한 운동화 끈을 하나 찾아 꺼내왔다.
목에 줄을 칭칭 감은 채 온 팔다리의 힘을 쫙 빼보았었다. 그날 밤 내가 그 일에 충분히 능숙했다면 아마 지금처럼 살아서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대로 숨이 막혀 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푸는 것도 쉽게 되질 않으니 나는 조금의 불빛도 들지 않는 시커먼 내 방에서 엉거주춤 앉아 눈만 꿈뻑꿈뻑 떴다 감고 있었다.
몇 가지 생각이 들락거렸다.
(물론 수의대를 다니는 학생들이라면 앞으로의 장래희망이 매우 다른 방향이라고 해도 이 인력양성과정을 반드시 수료해야만 졸업과 면허시험 응시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활동을 원시시대의 유목민처럼 혼자 다 해결하면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사실 ‘잘 몰라서 마음이 편할 뿐이지’ 결국 혜택 받은 만큼 죄도 같이 짓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걸 확실하게 ‘죄’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말이겠지만. 대체 누가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혼자서만 대단한 일인 양 떠안고 간다는 생각이 바보 같고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면역체계가 완벽해서 항생제, 항암제의 개발이 전혀 필요 없는 신체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굳이 실험동물을 수없이 죽여가면서 개발을 하지 않아도 천년만년 건강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사람은 그럴 수 없는 미완성된 신체를 끌고 다니며 살아야 하는가?
피터 싱어가 동물권에 대하여 정의할 때, ‘행복이나 고통 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신경계가 발달한 생물체’를 인간 이하의 것으로 취급하고 생명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그의 저술에 깊이 공감한 입장에서 볼 때, 고기를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신체로 인간이 태어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째서 우리들은 그럴 수 없게 태어난 것인가?
아직 식물이 느끼는 통각이나 의식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언젠가 ‘벼를 낫으로 베면 벼가 굉장한 고통을 느낀다’와 같은 게 증명된다면 사람이 죄책감에서 더 이상 맘 편하게 도망갈 수 있는 구석이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인가? 햇빛을 빌려 쓴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낄 정도가 아니라면, 광합성이 유일하게 남은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새벽 5시 반 정도가 되었다.
나는 사람의 신체가 생각보다 참으로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이상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운동화 끈을 풀었다. 목이 잘 가려지는 터틀넥을 입고, 핫식스와 커피를 잔뜩 챙겨서 수업을 들으러 나갔다.
이제는 어엿한 자살위험군에 들어간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삶의 가치에 대한' 없던 고민이 생겨 나와 나를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만 죄책감 느끼는 것은 억울해’ 하면서 버틴다는 것 따위는 임시방편인 해결책이다.
환멸감이 들기 너무나 쉬운 내 삶에 대해서, 삶을 사는 가치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더욱더 강한 논리를 생각해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장 힘들고,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의식이 아주 흐릿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해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답이 필요했다.
그 시기에 나름대로 짜내 보았던 생각이,
'삶의 가치'란 +의 값을 갖는 상수가 포함된 함수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충분한 해답을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실험동물을 사용하는 과정을 희생 (sacrifice)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이 자원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자고 말한 적이 있나요?’라고 물어보고 싶은 적이 많았지만 한 번도 공개적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 그 시기 전후로 읽어봤던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 - ‘전투 조류’]에 '완전생물 카즈'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창작물이니까 엄밀하게 따질 이유는 없지만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신체 능력들을 고루 겸비하면서 그 한계를 아득히 초월했다 ‘ 이런 설명으로 퉁치는 걸 생각해보면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인체를 베이스로 만든 형상에 완전하다는 이름을 그렇게 쉽게 붙일 수 있다고? 애초에 대부분의 신화가 ’ 인간은 신의 아바타 – 신과 비슷한 형상‘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서 시작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완벽함에 가까운 생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비교해봤을 때 엄청나게 놀라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