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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of Spades Feb 27. 2019

FAQ 1 - ‘삶의 가치’ (3) [완]

'삶의 가치'란 +의 값을 갖는 상수가 포함된 함수인가?

“우리는 작고, 불완전하며, 우리의 육체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질량에 비해 우리는 매우 멀리 보고 커다란 개념을 알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삶의 가치’ (2) 편에서 생각해보았듯,

실험동물을 희생시키며 개발한 약과 의료기술들이 없었다면 평균수명이 턱없이 짧았을 것이 사람의 삶이다.

육류 없이는 제대로 발달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 사람의 삶이다.


인류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는 것이 어쩌면 굉장히 자연스러웠을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이란 신을 닮게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대 사회의 지식수준에서 생각해보면 사람의 신체는 너무나 불완전한 구석이 많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이런저런 기능이 더 있어도 좋았을 텐데’ 싶은 부분들이 부족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라고 가정되는 신더러 ‘인간이랑 당신이랑 닮은 구석이 참 많아요!’라고 말한다면 신이 많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그런 불완전함을 심하게 느끼다 보면 내가 사는 세상은 참 넓은데, 내가 갇혀있는 나의 몸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데, 내가 단 하루라도 내 신체기능 이상의 범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가? 아쉽게도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매일 잠을 자고 눈을 뜨면 나는 어제와 같은 신체 – 자고 있던 몇 시간 동안 미세한 노화가 축적되었을 것을 제외하면, 닮은 - 같은 손과 발의 움직임, 같은 수준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할 수 있다. 광합성 기관 같은 새로운 기관이 짠 돋아나거나, 날아다니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은 드라마틱한 일이 전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삶이란, 정말로 거대한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들로 구성된다.

나는 내가 디디고 있는 지구의 크기, 가속도를 크게 느끼지 않는 상태로 표면에 붙어있는 상황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지구의 어마어마한 공전속도, 태양계의 크기, 우주를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정말로 광활한 세상의 크기를 생각해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이 작은 신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으로 세상에 개입할 수 있는 것과, 정말로 거대한 세상이 공평하게 던져주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으로 ‘삶이 존재한다’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특이한 개념이다.


다소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삶이 꺼져가는 순간이 어떻게 느껴질지를 한번 시뮬레이트 해보자.

내 자아는 점점 허공에 떠올라가는 형태로 희미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나의 신체의 감각기관들은 아마도 하나하나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기능을 잃어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이 멀고, 후각이 사라지고, 귀가 닫히고, 촉각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외부, 세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을 내가 감각하지 못하고, 감각된 정보를 통해 내가 내 주변의 세상에 운동기관 혹은 발성기관과 같은 것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가 오면 – 그게 삶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나의 기억력이 옅어짐에 따라 나의 이름이나 내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허공에 떠올라가는 형태로 희미해지는 자아 – 그래서 이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보곤 한다. 나의 몸매 관리 정도에 따라, 최후의 순간에 내 신장이라면 아마 70 ~ 90 kg 정도의 질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태양의 무게가 얼마나 초월적으로 크게 예측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보면 내가 나의 자아를 가지고 사고하며 행동할 수 있는 한계 – 나의 신체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작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작은 질량을 가진 존재인데도,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정말로 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 없이 살지 못하며, 반대로 세상이 가진 방대함과 광활함을 경외하며 감탄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기록하고 옆의 동족에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지구 상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종족이 몇 되지 않으리라고 예상한다. (돌고래끼리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고 하는데, 돌고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작디작은 인간의 신체이지만, 죽기 전에 이러한 생각과 고민에 둘러싸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내 몸에게 고마울 때가 있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커다란 고민을 안겨주었던 멘티들도 그렇고, 굳이 ‘삶’ 같이 무겁기 짝이 없는 주제에 대해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며, 모든 사람은 잠깐 쉬면서 뇌를 쓰는 것만으로 이러저러한 고민들을 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삶의 가치’를 생각하려면, 삶이란 게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 – 내 신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한계, 즉 나의 신체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고, 단계 단계별로 ‘삶의 가치’ 즉 ‘삶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어떠한 의미 있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진행해보도록 하자.




1. 삶의 가치에 + 의 절댓값이 있다고 생각하는 1단계: '나의 자아란 존재하는 개념인가?'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무언가에 대해 회의하고 의심하는 순간, 무언가를 회의하고 의심하는 나는 최소한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회의할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수천 년 전에 이미 말한 명제이다. 이를 Cogito, ergo sum이라는 유명하며 비슷한 말로 데카르트가 후에 다시 한번 강조한 적이 있다.

매우 작고, 수의학도로서 생각해볼 때 ‘이런 기능 좀 있었으면’ 생각되는 부분이 많은 – 다시 말해 어설픈 구석이 몇몇 있는 신체이지만 ‘나’는 인간의 신체를 가진 상태로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2. 삶의 가치에 + 의 절댓값이 있다고 생각하는 2단계: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해낼 수 있는 역할과 활동들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기본적으로 신체가 충분히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구와 비교해보면 미안할 정도로 작고, 한 번에 둘이나 다수의 신체를 다룰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양팔을 휘두르면서 연설을 하던, 수백만 중의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NASA 우주비행사로서 조정간을 잡고 있건, 방학에 특별히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휙휙 스크롤하건 우리가 살면서 진행할 수 있는 모든 행동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통제하고 움직일 수 있는 신체 기관의 운동으로만 가능하다.

신체를 조종하는 주체가 곧 나이며, 나의 자아이다. 우리는 정말로 작은 신체로 운동하면서 우리의 신체에 비해 매우 거대한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만리장성의 주춧돌을 긁고 있는 새끼 고양이와도 같은 상태이다.


죽은 상태란 이처럼 작은 신체를 가지고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우리의 신체로 들어오는 어떠한 감각도 수신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다행히도 우리의 육체 정도의 범위에만 아주 깊게 관여되어있는 개념이 죽음이며, 죽었다고 해서 거대한 세상이 함께 망한다거나 하는 일은 잘 예상되지 않는다.




3. 삶의 가치에 + 의 절댓값이 있다고 생각하는 3단계: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산다면, 그것이 궁극적인 삶의 가치인 것인가?'


기억은 변할 수 있다. 개인적인 범위에서 보면, 죽은 신체에 남아있는 기억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산다는 것은 어떠한가? 이러한 목표도 상당히 약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아본 바로,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을 수 있었고 전 세계적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성공적인 사람의 사례는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 활동하기 시작한 30만 년의 역사 중 단 한 사례밖에 없다. 그조차도 겨우 2천 년을 조금 넘긴 게 다이다.

예루살렘 지역에서 태어나 중동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예수’라는 남자의 사례이다.


기억이라는 개념에만 너무 의지해서 삶의 가치를 판단하려고 한다면 상당히 허망해지기 쉬울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예인이나 영화배우로 성공할 수 있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을 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는 지금도 매일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사람’ 기록을 하루씩 더 연장 경신하고 있다.




4. 삶의 가치에 + 의 절댓값이 있다고 생각하는 4단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도, “내가 지금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 이 남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


광개토대왕기념비

오벨리스크

피라미드


한 인간으로서 한 사회집단의 정점에 서봤던 사람들이라면 으레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싶은 욕망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기 마련이다. 내가 떠올려본 이러한 건축물들은 아마도 당시 주변에서 구할 수 있었던 가장 견고한 물질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을 것이며, 분명히 이를 지시한 어떤 인간의 업적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길 바라며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람의 어떤 뼈보다도 단단할 암석들에 새긴, 혹은 암석들을 쌓아 만들어진 이런 것들은 결국 금이 가거나 무너져버리고 만다.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라고 만들어진 취지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으나, 한계가 있는 것이다.


넓은 세상에 비하면 정말 작디작은 신체이지만, 초라하다고만 생각하고 슬퍼하는 대신에 한번 자신의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이 자아가 당신 외의 어떠한 존재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가?

당신의 신체를 조종하는 일은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된 결과인가?

당신은 100% 억지로 일하거나 생활하고 있는가?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앞으로 몇 년이 더 지속될지 모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기간 동안 우리 신체의 통솔권은 천부적으로 우리의 자아에 하나하나씩 부여되어있다는 사실 하나이다.


당신이 선택하고 행동한 어떤 일이 있다면, 설령 세상에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가 단 하나도 안 남아서 이것을 목격하고 기억할 존재가 없더라도, 심지어 나 스스로가 죽어가면서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나의 자아가 나에게 주어진 신체를 이용해서, 이 세상의 어떤 공간에서, 어떤 시간에, 무엇인가를 '했다'는 사실만큼은 사라질 수 없다.


스스로의 상태가 살아있는 것에서 죽어있는 것으로 변한 다음에는 선택도, 행동도 불가능해진다.

나는 이것이 부정되지 않는 한, ‘삶의 가치’를 정의할 때 + 값을 갖는 상수가 확보된다고 판단한다.




5. [발전] 삶의 가치에 + 의 절댓값이 있다: 우리의 자아로 ‘사실’을 남기는 것이 추후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

[최소한, 보험 든다고 생각하면] 잘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가지론)


4단계까지 말하고 나면 대부분의 멘티들이 ‘그럼 잘 선택해서 사는 게 좋겠다’ 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여기에 격하게 공감했었다.


굉장한 악인의 재판을 가끔 뉴스에서 다룰 때가 있다.

희생자나 유족이 '절대로 저 사람이 사후에도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인터뷰하는 경우가 있다.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확신을 가지고 '분명히 저승(?)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저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줄 수는 절대 없다. 알 수가 없고 현재로서는 증명할 수도 없는 개념이지 않은가?


‘신과 함께’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천만 관객을 넘는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삶의 가치’의 필수항목이자 상수인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라는 걸 되새겨보면 나는 굳이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심판자' 같은 걸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면서 행동하는 그 순간에 사실이 발생한다. 굳이 누가 감시하면서 기록해둘 필요도 없다.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모든 순간이 사실로서 남는다. 조작하고, 묻히고, 오해당하거나 무시당해도 우리가 행동했던 순간들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좋은 일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뿌듯해질 것이고, 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면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감각과 인식범위를 벗어난 곳의 세상에서 – 사람의 신체가 지닌 감각기관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물론 ‘통계학자와 법관’ 이 우리를 절대로 들키지 않고 어디선가 관찰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절대로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 우리의 행동이 카운트되고 죽은 다음의 무언가에 (다른 형태의 자아를 얻고 생활하는 상황이라거나)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감각기관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적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색과 물체들이 –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거나, 동물이라거나, 물건이라거나 – 매우 많지만 가시광선 범위 외의 파장의 빛을 우리는 우리 신체 자체로는 전혀 인식할 수 없다. 이걸 생각해보면 무작정 삶의 끝이 허무라느니, 죽으나 사나 똑같다느니 하고 체념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쓸데없는 상상을 좀 덧붙이면서 ‘활발히 살아보면 뭔가 남아서 전송되거나, 후에 영향을 주거나 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가정을 덧붙여야만 한다는 게 가장 큰 한계이긴 하지만, 난 이런 태도 쪽에 좀 더 마음이 많이 간다.




나는 알을 들고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는 펭귄을 생각해본다.

그 펭귄은 어느 날 깨어봤더니 발등 위에 알을 올려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 무작정 산을 걸어 올라가는 일방통행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상태이다.


그 펭귄은 두세 걸음만 앞으로 나가보았다가 주저앉아서 가만히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최대한 정상 가까이 올라가 본다는 생각만으로 쭉 걸어 올라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얼마 있다가, 펭귄의 발등 위에서 알이 깬다. 그 알 안에는 발등 위에 알을 올려놓은 채 태어난 펭귄이 있다. 앞서 죽은 펭귄과 다른 점이라면, 그 펭귄은 죽은 펭귄이 일생동안 걸어 올라갔던 거리만큼 나아간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자신이 그만큼 올라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이고, 이미 죽은 펭귄의 기억은 전혀 없다.


알에서 깬 펭귄과 그 알을 옮겼던 펭귄이 서로를 사실상 전혀 모른다고 해도, 펭귄의 몸을 움직이는 컨트롤러가 뒤에서 앞으로 전해진 것이라면? 자아라는 게 지금 당장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체에만 붙어있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지만, 감각 가능한 법칙 너머에서 두 다른 신체의 주도권이 같은 플레이어의 손에 쥐어지는 게임패드 같은 거라면 어떻게 될까? 최대한 행동하고, 선택하고, 활동하다가 죽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한다. 악수는 살아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전혀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길일 것이고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는 가정을 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정답은 아니다)




어떤 누구도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하는 것이 의무라고 할 수 없고. 이를 중간에 관두는 것이 나쁘다 악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러한 단언의 문제점은 ‘당신이 행동할 방향’을 누군가가 정답인 양 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그 의무라는 게 실은 대단치 않은 것이거나, 그런 강조를 하는 사람이 사기꾼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당신 의도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들은 다르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신체를 자유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활용해서 살아있는 동안 '사실' 들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자율적이며 가장 적극적으로 존재하는 방법임은 분명하다.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는 펭귄에 대해서 그 누가 관심이나 갖겠는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세상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나의 몸짓 역시 마찬가지다.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가 불분명할 정도로 사람 개개인의 크기와 비중은 거대한 세상에 비하면 너무나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서 움직인 것과 안 움직인 것의 차이는 절대적이며, 어쩌면 선택하고 행동하면서 만들어진 사실들이 이후에 다른 형태의 신체를 컨트롤하는 기회가 왔을 때 여기에 무언가 이득을 주는 방향으로 영향을 주는 체계가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삶의 가치‘ 란 + 값의 상수를 갖는 개념인가?라는 질문에서 생각을 시작했다.

나는 그럴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크게 느껴진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동일한 질량을 갖는 단백질이나 돌덩어리보다 감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폭이 매우 넓은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 없이 손가락을 휘휘 젓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그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남긴다.



지금 당신의 상처가 깊고,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우울감이 당신을 머리끝까지 담가버린 상황일 수 있다.

죄책감에 압도당하거나, 당장 힘들어 죽을 것 같더라도

지금 여기서 살아있는 상황을 멈춰버린다면 그 선택 이후 당신의 신체로 행동하고 ‘사실’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전부 사라져 버린다.


0에서 출발한 삶이니 0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발달 안 된 배아세포 단계의 시점과 지금 당신의 모습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살아있는 상태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행동할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나니까, 삶의 가치가 지닌 +값의 상수를 생각하면 일찍 죽는 것이 주는 페널티가 없지 않다고 나는 이야기한다.




(2)에서 말했던 대학생 때의 사건과 경험 이후, 멘토링을 하다 보면 죽고 싶은 생각이 가끔 든다는 사람들을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다만 그때는 좀 더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삶을 멈추면, 지금 주어진 신체로 세상을 관찰하면서 행동했던 흔적으로서 ‘사실’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진다. 굳이 손해를 따지자면 이것만큼은 반박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삶은 내가 나의 육체를 지배해서 움직이는 것이 핵심이다.

선택의 주도권을 어떤 상황에서든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죽어있지 않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사실들을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한다. 이러한 설명이 당신에게 힘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멘토링 중,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내가 반복적으로 말했던 이야기들을 추가로 적는다. 각각의 항목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1. 2019년에 내가 죽는다면. 지금 이 지구에서 2019년에 사는 삶을 다시 느끼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추측) ‘내 삶의 범위는 내 신체 밖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지금 나는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지 감각하거나 기억할 수 있는 바가 전혀 없다.


2. 우주가 매우 넓은 공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정의되는 모습의 자아로 살아볼 수 있는 것은 이번 시기가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3. 현재의 삶을 박탈당하거나 포기하기로 하는 것은 현재의 자아와 신체로 내가 겪으며 행동할 수 있는 일들의 가능성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4. 죽음 후에. 서로에 대한 기억이나 인식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행동한 것과 만들어낸 사실들에 '연관된' 존재가 있을 수 있다. 운이 좋다면 그 존재의 주도권을 나와 같은 자아가 가지고, KF-5E에서 F-35로 기종 변환한 파일럿처럼 감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삶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더라도)


5. 나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매우 사소하고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이 세상에서 발생했던 사건, 새로 생성된 사실로 존재한다.


6. 기왕 사는 삶의 과정과 기억을 꺼림칙한 일로 도배하느니 바람직하고 뿌듯한 일들 위주로 채우는 것이 좋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게 별 파급력이 없는 행동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이 작은 나와 내 신체에는 좋은 영향을 주는 것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7. 보상심리가 꿈틀대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잘했으니까 다음 생에 이득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욕망이다. 그런데 꼭 그런 인과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사는 동안 우리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보답이나 악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본다면, 지금 내가 인식하고 있는 신체와 자아로 살아서 행동하는 동안 내가 스스로를 더욱더 만족시킬 수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다.


8.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생각하고 선택하며 사건을 만들 수 있다. 사실을 새롭게 생성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가치는 + 값의 상수를 가진다.



“기억에 남는 삶을 만들고 싶다고 무리하면서 스스로를 과시하려 할 필요가 없어.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건과 사실을 만들 수 있다. 거대한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미미한 움직임이라고 깎아내려도 할 말 없지만, 이렇게나 작은 신체를 갖고도 사고하면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일이야.


우리는 지금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움직일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다. 죽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새로운 사건을 만드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고, 그 사건을 우리의 자아가 판단하고 선택해서 만들어내는 양이 많을수록 우리의 삶의 가치가 커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 스스로가 가장 확신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생각을 정리해보자.


* 내가 제시한 생각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택하고, 아닌 것은 버리며, 나름대로 더욱 좋다고 생각하는 항목들을 덧붙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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