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의 결과가 다 정해져 있고 예측 가능한 거라면 어떡하죠?
전번 챕터에서 다뤘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많은 멘티들이 만족해서 집에 돌아갔지만, 종종 ‘괜히 이야기를 나눴다가’ 스스로에 대해 의심이 더욱 커진 사람들이 위와 같은 질문을 들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와 우리 선조들이 굉장히 즐겨 사용했던 테마가 아닌가?
내가 접해봤던 것들 중 이 테마와 관련된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드라마 ‘도깨비’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개인적으로 별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운명 때문에 모든 게 결정되고, 모든 게 어긋나는구나!’ 하는 식으로 탄식하는 일을 즐겨했다. 나는 그런 방식의 생각이 심리적인 고통 경감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살다 보면 다양한 이유로 계획에 차질이 생기거나 크게 망해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는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나 다른 어떤 사람의 책임을 생각하는 대신 ‘운명이 이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느 정도 화를 가라앉히는 유용한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토리들을 보면
같은 내용들이 굉장히 많다. 앞서 제시한 넷 중에 이에 해당하는 것들을 고른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
드라마 ‘도깨비’
이 두 가지가 그렇다. (이래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영화이지만, 나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 싫다!)
운명을 극복해내는 사람들이 분명 나오지 않던가? 이런 '극복' 소재는 너무 흔하니까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겠다.
용어 정리를 미리 하고 넘어가 보면:
운명이나 외부에서 오는 경향성 때문에 앞일이 사실상 전부 정해져 있다고 보는 시각이 결정론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세상만사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들의 미래가 사실 예측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고, 우리는 사건의 진행방향을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주위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는 결과라고 해석해야 한다. 결정론이 맞다고 생각하는 한 자유의지라는 건 그 입지가 정말로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전번 챕터의 주제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하고 사건(사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였는데, 여기서 살아있는 우리의 자아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주장했던 삶의 가치는 전면 부정되고 만다.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결정론'이라는 테마에 연관된 주제들을 고민해왔던 사람들은 그동안 무수히 많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 중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그들 중 대다수가 철학적 개념인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해 생각하면서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을 수 있겠으나, 기묘하게도 그들이 관여된 ‘뉴턴 역학 시대의 물리'와 '양자역학 시대의 물리’가 이번 FAQ에 대답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9년에 입학하기 위해 수능을 쳐야 했던 나는 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물리 1, 물리 2를 들었었다. 요즘처럼 공부량이 합리적으로 조절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과학탐구를 무려 4과목이나 선택해야 했는데, 거기서도 물리 1을 풀었었다. 요즘은 두 개만 골라서 공부해도 된다고 하지 않던가? 정말 좋은 시대이다.
솔직히 말해서 전공과목을 다루는 내내 물리가 주연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그 당시 정말로 열심히 물리를 공부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물리선생님이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남고였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생각을 마음에 품고 이야기하신 건 아닐 것이다. 이해해달라.)
그는 칠판에 物理 두 글자를 크게 쓰고 뜻을 설명했다.
나는 여태까지 언어, 영어, 생물학, 화학, 지구과학 등등 매우 많은 과목들을 공부해봤지만 ‘물리’라는 과목만큼 거대한 뜻을 품은 과목을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 저 과목명이 영어의 'Physics' 란 단어가 중국의 한자로 번역되면서 미화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중국에 들어온 지 오래된 외래어들은 원래 뜻과 다른 한자를 쓰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USA 가 영어로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뜻을 파보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물리학은 전 세계 공통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설명하겠다'는 목적을 가지며 우직하게 달려 나가는 과목이었던 것이다!
그런 뜻을 배운 이상 물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과목별 응시인원수를 생각해보면 등급제나 표준점수제 어떤 걸 생각해보더라도 물리를 택한다는 건 정말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과목이었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정리해보자면,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전부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있다!’ 고 환호에 차 있던 시절이 뉴턴 역학의 시대에 나타났으나, 이러한 꿈이 크게 고꾸라지는 사태가 양자역학이 대두되면서 벌어졌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단, 고전적인 관점에서 물리 (모든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추측해보자.
뉴턴 역학 (고전역학)의 세계관에서 보는 세상은 신이 주사위 놀이 같은 걸 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물체들 사이에는 정해진 법칙으로 상호작용하는 규칙이 존재하고, 따라서 운동 중인 물체의 상태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에게 충분한 양의 데이터와 상호작용하는 물체들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있고, 관찰을 정확하게 한 상태에서 상호작용하는 법칙이나 공식들을 전부 알고 있다면 미래의 움직임을 전부 예측할 수 있다. 물리 1 과목의 경우 빗면에 걸쳐진 사각형 나무토막과 마찰력, 도르래 등등을 푸는 일에 급급한 경우가 너무 많아서 까먹고 넘어가기 쉽지만, 고전역학이 붐을 이뤘던 세계가 지금까지 쭉 인정되어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자 한다'는 목표와 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가능한 세계는 '세상만사가 결정된 운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단지 지금 당장 미래예측이 안 되는 까닭은 현재 상호작용하고 있는 물체들의 전체 목록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하고, 분명히 작용은 하고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법칙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계산에 반영을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안 그런가?
천체, 유체, 열, 전자기파가 설명되었다. 19세기 정도만 해도 뉴턴 역학과 뉴턴주의는 세상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기본자세와도 같았던 것 같다. 그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감히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 전부 소화해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결정론'과 관련된 것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 보겠다. 미리 논쟁을 풀고자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가설’ 이 아니라 ‘정확한 실험 결과들로’ 계속 뒷받침되어온 문장들이다. 비록 내가 물리학에 대해서는 초보자 중의 초보자지만, 가짜를 진짜라고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 미시적 크기의 물질들은 그것의 위치와 속도(운동량) 등 서로 다른 상태가 동시에 정확히 결정되어있지 않다.
– 관련된 개념: 불확정성 원리
* 미시적 크기의 물질들은 존재 가능한 상태들이 중첩되어 있다가 관측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 관련된 개념: 슈뢰딩거의 고양이
간략하게 설명해본다면, 세상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크기의 물질들의 상태를 설명할 때
'이것의 정확한 상태 조합 (위치 & 속도 등등) 이 a이다.'
라고 말할 수 없고,
'a일 확률이 67%, b일 확률이 33% 인 상태가 중첩되어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만 있다는 것이다.
미시적 크기가 아닌, 충분히 커다란 크기의 물질을 상대로 이렇게 말하면 아주 이상해지겠지만
(너는 지금 방 안에서 앉아있을 확률이 94%이고, 남산타워에서 달리고 있을 확률이 6%이다 - 이런 식으로?)
아주 작은 크기의 입자들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이것은 불확정성이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지 1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고, 초기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던 내용이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을 낯설거나 싫게 느낄 수 있다.
전자는 충분히 작은 크기의 물질이니까, 원자와 전자의 실제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원자 모형을 볼 때마다 나와 친구들은 ‘아칸’이라고 말했었는데 요즘도 그러한가?
원자를 생각할 때 전자와 원자로 꾸며놓은 태양계 비슷한 모양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이것이 굉장히 많은 과학교과서에서 그림과 함께 설명하는 모습이고, 과거에는 '이러지 않을까?'라고 추측하면서 받아들여졌던 한 때가 있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 발전되어 오기까지 그런 모형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는 실험 결과들이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아칸의 모습과 같이 '전자가 빙글빙글 어떤 궤도를 돌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틀리고
‘어느 구간에 어느 %로 전자가 존재할 확률이 있다’ 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데,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높은 곳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황색과 파란색은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높은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구름처럼 색을 입힌 곳에서 전자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은 90%이고, 그 외의 부분에서 발견될 확률은 매우 낮다.
(전자구름이라는 건 구름 내의 물 알갱이처럼 전자가 많다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고 그림과 설명도만 보면 구름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 깊게 설명하기엔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니 원 주제와 관련된 핵심만 말한다면,
우리가 원자처럼 작은 것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진사라고 할 때
'이 전자가 핵 주위를 도는 공전속도가 ~ 정도니, 몇 초 때에 사진을 찍으면 원자의 모양은 @ 로 나오겠다'
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어떤 위치 (상태)에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이 이상한 문장이 실험을 하면 할수록 계산 결과로 전부 증명이 되니
고 믿어왔던 뉴턴 역학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황망했겠는가! 저 물체가 저곳에 있을 확률이 *% 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미시세계를 설명할 때에는 상식이 되어버리니까, 이런 상황에서 '물체들의 위치를 전부 안다'는 있을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이곳에 있을 수도 있고, 저쪽에 있을 수도 있고, 요동치는 상태가 한순간에 중첩되어있다. 양자 요동이 위치를 불확정하게 만들어버린다.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한 결과가 확률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미래의 예측이 불가능해져 버린다!
뉴턴 역학으로 바라보던 세계는
였지만
양자역학의 법칙이 지배하는 미시 레벨의 것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 이 세상은 더 이상 예전에 기대하던 그런 모습으로 바라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신이 있었다면 이 세상을 그렇게 설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 고의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 어떻게 보면 결정론 (운명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실험 결과로 입증된 양자역학이 실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나는 닐스 보어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서 얌체처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진실로, 물리학에 대하여서는 스스로 생각할 때 너무나 비전문가스러운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뛰어난 독자들이 있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정말 조심스럽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적어도 왜곡하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곡해해서 독자들을 현혹하려 하는 이야기는 없도록 할 것이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양자역학이 상대적으로 최신 학문이고, 너무나 이상한 방향으로 SF나 기타 매체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 '퀀텀 라이플' '퀀텀 수류탄' 이런 거면 차라리 애교지만, 간혹 사이비 종교 같은 방향으로 악용됨 - 알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다.
그 정도로 양자역학이란 꺼내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자유의지'라는 개념과 '결정론'을 생각해볼 때마다, 나는 양자역학이 알려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정성'을 생각해보면서 굉장히 큰 희망을 가진다.
세상을 구성하는 이치를 설명하는 목표를 가진
이름에서부터 엄청난 포부가 느껴지는 이 과목에서, 결정론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강한 수준의 결정론’ 이 타당하려면, 어떠한 정지된 시점에서 위치와 상태가 정해져 있는 물질들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법칙에 따라 다음 시점에서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상태가 변해야 한다.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강한 수준의 결정론은 불가능하다.
양자 수준의 입자들에 대해 '너는 정확한 상태가 결정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시 (작은 입자) 단계의 것들이 불확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다.
미시 (작은 입자) 단계의 것들로 이루어진 거시 (큰 것들) 단계의 큰 것들은 당연히 스스로를 구성하는 미시 (작은 입자) 단계의 것들이 가지는 불확정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구성요소가 지닌 불확정성이 이들이 모아져 만들어진 거대한 것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것에 불확정성이 존재한다.
뇌세포와 우리의 의식, 행동이 연결되어있는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심신 일원론이다.
뇌세포의 화학작용에 의해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선택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아’를 설명할 때에 영혼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강점이다. 영혼이라는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매우 까다롭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개념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정신과 자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 사고, 판단이 전적으로 뇌세포 내의 화학작용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입자들의 미시 단계에서 불확정성이 있다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매우 희망적인 사실이다. 거대한 것을 구성하고 있는 미시 입자의 단계에서 불확정성이 있다면, 이것들로 구성되는 보다 큰 단위에 이러한 불확정성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심신 이원론은 자아와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들 중 역사가 매우 긴 것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으나, 존재의 증명 (즉, 과학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개념인 영혼 등에 의존해서 정신작용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오컴의 면도날을 생각한다면 심신 이원론 쪽으로 우리의 자아와 자유의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방식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래도 심신 이원론을 고수한다면, 자유의지가 존재하느냐 같은 고민을 할 이유도 없다.
영혼 자체가 매우 유니크한 것이고, 자유의지란 각 영혼마다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반면에, 이 방법대로면 영혼이라는 것을 '무언가 대단한 존재가 앞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다 정해놓고 풀어놓은 개념'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자유의지란 없고 모든 게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믿어버리고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래서 오컴의 면도날로 잘라낼 수 있는 요소들을 유지하면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논리적이지 않고 '믿느냐 안 믿느냐' 영역의 문제가 되는데, 그것이 좌지우지하는 가치가 개개인에게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뇌를 다친 경우 발생하는 성격의 변화 & 기억의 변화, 약물로 조절될 수 있는 감정과 성격의 변화 등, 마음 – 몸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는 증거를 통해서 정신작용의 실체에 대해 과학적이고 보다 개선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애매모호한 존재가 나의 사고를 전부 지배하는 것이다’ 같은 가정에만 매몰되는 것보다는 이러한 태도가 정답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다.
물리 법칙을 초월한 개념인 영혼의 존재가 있다는 가정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기본적인 속성에 ‘예측 불가능함’ = ‘우연성’ 이 포함되어있다.
만약, 뇌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상태를 동일하게 배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결정론자들이 좋아하는 상황) 그러한 뇌에서 만드는 사고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전부 동일한 판단을 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뉴런을 구성하는 입자들의 양자적 요동”과 “양자역학적 ‘결정되지 않음’ 상태”가 의식의 생성 및 작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확실히 예상되기 때문에, 자유의지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나는 본다.
적어도 ‘만물이 다 정해진 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철저한 결정론은 일단 심신 일원론을 일부라도 받아들인 상태에서는 반박이 되기 때문에 – 예를 들어서 뇌에서 이루어지는 판단과 사고가 영혼을 어느 정도 더럽히거나 깨끗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도 -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가장 최근 철학자들의 고민을 확인해보면,
‘절대적인 운명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보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우연” 이란 게 영향을 주는 우리의 선택이 말 그대로 전부 “우연”에 의한 것으로 결정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 자유 의지로 선택했다 ‘ 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 존재하는가? 우리는 ’ 자유 의지로 선택했다 ‘ 고 느낌은 가지고 있지만 증명방법은 아직 밝히지 못한 것 같다.’
까지 합의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철학 백과사전’ 이 있는데, 다음 주소의 (https://plato.stanford.edu/entries/incompatibilism-theories/) 3.2 Luck, Again 항목을 보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상술한 몇 줄의 문장들이 너무 머리를 아프게 한다면 잠깐 눈을 돌리고 무시해버리는 것도 좋겠다. 사실 나도 영어 원문부터 읽고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굉장히 머리가 아팠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2019년의 철학 논문 주제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현재까지 존재했던 인류들 중 가장 많이 발전한 철학 논문들과 사고 과정들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지금 남아있는 문제들은 사상 가장 까다로운 주제들이며, 따라서 아직까지도 철학자나 사람들이 풀어내지 못하고 남아있는 상태인 것이니까.
요점은, 철학적인 면에서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깐깐한 사람들까지 만족시키는 설명은
‘자유의지: 불가지’ -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실히 설명할 방법이 아직 없다.
그나마 이 정도만 되어도 어딘가? 결정론이 틀렸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신이 난다.
우리는 상상 속의 어떤 존재가 미리 태엽을 감아둔 대로 움직이거나 반응을 내뱉는, 정해진 사건들을 프린터처럼 뽑아내기만 하는 불행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뉴턴 역학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믿고 살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우리는 2019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1. 자유의지의 가치가 부정되는 결정론 (양립불가) - 이 세상의 이치인 세상
2. 불확정성이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있는 세상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했고, 괴롭게 하고 있지만,
1과 2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2를 택하고 싶다. 다행히, 2가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개인 선호의 문제가 아닌 과학적인 실험과 증명의 영역에서 계속 힘을 얻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