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이제 오십이 넘어선 질풍노도의 오춘기라서 씨한 보다 더 스산한, 그래서 떨어지는 묵은 이파리 한 닢에도 마음이 실려 애절해지는.. 가을은 참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계절이 되었네요.
남겨진 옷가지, 등반장비, 기타와 악기들.. 형의 수저 젓가락, 피우다 만 담뱃갑, 그리고 어디엔가 숨겨져 있을 소주병이 나올 때마다, 내 눈에 보인 일면식도 없던 낙엽의 백만 배만큼의 생각이 실리어, 마음 북받칠 형수님께 가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만, 형이 떠난 지금이 가을이네요.
30년이 훨씬 더 지난 인후아파트 시절.. 2박 3일, 3박 4일 머물다 가면, 집안에 먹고 마실 것은 초토화되고, 슈퍼에 어마 무시한 외상술값을 남기고 가던, 한자리에서 소주 백 병도 넘게 마시던 우리는 눈치도 염치도 없는 산악부 후배 놈들이었어요.
그렇게 형은 후배들에게 밥 사고, 술 사 먹이고, 집에 불러들여 몇 날 며칠을 민폐를 끼쳐도, 형수님은 싫은 내색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마음으로 백업해주셨으니, 장례식의 문상객들 숫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형의 덕성과 사람품의 절반은 가히 형수님 몫이라 생각해요.
인수봉에서 30m를 추락하여 형네 집에서 몇 달을 먹여 재워가며 간호해 주셔서 걸어 나간 우익이 이야기, 말 못 할 병에 걸려 형수님이 내 엉덩이에 페니실린 항생제 주사 놓아준 이야기, 설악산 장기 등반에서 만삭으로 함께 하다 배 아파 원주에서 낳았다고 둘째 이름이 원중이가 된 이야기, 겁 많고 소심한 클라이머들의 적벽과 토왕폭 등반 이야기, 조카와 함께 했던 히말라야 트레킹 이야기..
숱한 산과 여행 그리고 술 이야기.. 떠난 형과의 추억을 생각하면, 오십 줄을 넘어선 우리들이 아직 스무 살 철부지로 보인다는 형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였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그런 줄 알았어요, 결혼해 살아보니, 형수님은 백만 명 중에 하나 있는 천사표 란걸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우리 은영이가 잘 못한 다는 소리로 들릴 수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 아니에요..
장례식장에서.. 산악부 후배라고 우리 손을 붙잡고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변변하지 못한 후배들을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셨다니, 앞으로 갚지 못할 그 마음 빚과 상주를 대하는 듯 후한 대접에 가슴이 저리고 아렸어요.
그 황망하고 무서웠을 새벽에.. 걸려온 형수님 전화도 나는 받지 못하였으며, 또, 먹고사는 핑계로 이일 저일 다 보고 오후 넘어서야 내려간 내가 죄스럽고 부끄러웠지만, 모든 준비 꼼꼼하게 챙겨주신 남원의 후배들.. 일석 씨, 00 씨, 종렬 씨에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에요.
지금 죽어도 호상이라던 형의 생전 이야기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서, 좋은 시절 음악 하고, 산에 다니며 좋은 사람들 만났으니.. 형수님과 결혼하여 아이들 건강하고 반듯하게 장성하였으니.. 평생 베풀고, 싸움은 피하고 살아서 누구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았으니.. 참 충분히 잘 살았다는 자신 있는 이야기도 되지만,
어쩌면.. 본인의 명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들고.. 그것을 맞이했을 때, 형답게 가오 잃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다짐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형을 통해서 산을 배웠고.. 맛있는 요리와 술도 형이 사준 것이 처음이었던 것도 많았고.. 치사하고 공정치 못한 일에 “그러려면 나는 안 해!!” 판 엎어버리는 남자로서의 가오도 형에게 물려받았으니, 형은 나에게는 아빠 같은 선배였지요..
해 드린 것도 없이 받기만 했는데, 장례식에서 들었던 문상객들의 과분한 칭찬과 대접까지 소급하여서, 앞으로 형수님에게 잘하겠다고 우리 후배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늙어서 지팡이 짚고 다닐 때까지 꼭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제 삼우제가 끝나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재고도 파악하고 주문도 받고 돌아오는 어음도 막아야 하는 바쁜 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박근혜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ㅋ
형수님..! 남겨진 물건들 보고 형 생각이 나거든, 마음이 무뎌질 때까지 실컷 울고, 바쁜 와중에 틈내서 또 우시고.. 정 힘든 물건들은 버리던지 나에게 보내시든지 그러세요..
49재는.. 망자가 이승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다른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래요 형이 햇살 좋은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2층 집에서 앤 해서웨이 같은 엄마를 만나 건강하고 예쁜 아가로 태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그날 형 누운 자리 옆에서 형이 좋아하는 소주를 마시며 꼭 그렇게 되시라고 기원을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