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영의 시작
수영을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달. 드디어 평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흔히 ‘개구리헤엄’이라 부른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이 영법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강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바닥에 누웠고, 강사는 내 발뒤꿈치를 잡아 허리 쪽으로 당긴 뒤, 발 안쪽으로 물을 차고 쭉 뻗는 동작을 수강생들에게 시범 보였다. 순간, 뒤에서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었다. 약간의 부끄러움이 스쳤다.
곧이어 또 다른 수강생이 불려 나왔다. 그녀의 발차기 시범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그녀의 기술보다 발끝에 칠해진 파란색 매니큐어에 머물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강사의 설명보다 그 작은 디테일이 더 인상 깊게 남았다.
강사는 평영의 핵심은 발 안쪽으로 물을 차는 것, 마치 축구에서 인사이드로 공을 차듯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유선형 자세를 유지한 채 3초 정도 물살을 타며 나아가는 그 ‘순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무리 힘껏 발을 차고 팔을 저어도 내 몸은 제자리였다. 물이 단단한 벽이라도 된 듯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벌써 석 달이나 수영을 배웠는데, 아무리 새로운 영법이라도 이 정도로 앞으로 나가지 않는 느낌은 생소했다.
문득,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강습이 끝난 후, 위층에서 다른 사람들의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었다. 그때 한 중학생이 자유형을 능숙하게 헤엄치다, 앞사람이 느리게 가면 자연스럽게 평영으로 바꿔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그때부터 평영의 느린 부드러움이 좋았다.
그러나 막상 배우고 보니 평영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없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에 재미를 잃었을 때 그 일에 대해 어떤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평영을 배우며 왜 수영을 하는지를 되묻게 되었다.
나는 평영이 속도를 내기 위한 수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영이라고 생각한다. 느리지만 체력 소모가 적다. 그리고 이 점이 내가 추구하는 삶과 닮아 있다. 남들처럼 빠르게 앞서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천천히 꾸준히 나아가는 것.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는 것. 깊이 있는 삶은 효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너무 느린 것 아니냐?”고 여길 만큼 천천히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물론 비록 더디더라도, 매 순간 혼신을 다해 온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깊이가 더해진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선뜻 자신이 없다.
어떤 고승이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은, 결과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무심함에서 나온다고.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은 어떤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딜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소설가는 며칠 밤낮을 글을 쓰고 고치는 고통을 견디고, 역도 선수는 근육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디며, 가수는 목이 쉬고 목청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견딘다.
석가모니가 말했듯, 삶은 고통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고통을 상수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 인생의 미션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찾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큰 보물을 발견한 셈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고통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가 진정한 힘을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확실한 것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디다 보면 분명 더 강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단호함까지 갖게 된다.
나는 수영장을 왕복하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물속에서 숨을 참고, 다리 근육이 뻐근해지는 그 느낌을 안다. 그것을 고통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아픔은 나는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계속 수영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