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한참을 걷고 있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공간이었다. 발밑에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고, 걸음을 멈추면 어딘가로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다는 느낌만이 선명했다.
그때, 앞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환한 얼굴을 한 존재였다. 그 눈빛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책을 읽어주던 밤처럼 따뜻했고, 목소리는 오래전 잊은 멜로디처럼 마음을 울렸다.
"어서 와, J."
"당신은 누구죠?"
"나는 '빛'이라 불리는 존재야. 넌 지금, 삶과 삶 사이의 공간에 도착했어."
J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병실에 있었다. 기계음, 가족들의 흐느낌, 자신이 놓은 마지막 숨결까지도 기억났다.
"그럼… 내가… 죽은 건가요?"
"육신은 그랬지. 하지만 넌 '너'로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부터는, 네가 왜 태어났는지 알게 될 시간이야."
그 순간, J의 눈앞에 거대한 빛의 스크린이 펼쳐졌다. 한 장면씩, 그의 삶이 되감기듯 펼쳐졌다. 어린 시절, 첫사랑, 외면했던 친구, 거짓말, 눈물, 후회, 그리고 희미한 기쁨들. 때로는 뿌듯했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었다.
"이건… 너무 아프네요."
J는 작게 소리치며 잠에서 깼다. 목덜미에 땀이 흥건했다.
"빛,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해. 우리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또 왜 이런 고통을 겪는 건지 말이야."
"그 질문은, 생명이 스스로에게 묻는 가장 오래된 질문이야. 사실,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되지."
"마지막 순간? 죽기 직전이라는 뜻이야?"
"그래. 육신이 사라지기 직전, 자아의 마지막 빛줄기 속에서 너는 갑자기 모든 걸 깨닫게 돼. 네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무엇을 이루러 왔는지. 그것은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야. 아주 깊은 곳, 네 안쪽 기억에서 솟아나는 것, 신의 큰 설계 속에서 너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비전이지."
"모든 걸 안다고? 그동안 왜 몰랐던 거지?"
"모르게 설계되어 있었거든. 그 무지를 통해 우리는 배워. 모든 고통과 실수가 다 의미가 있었단 걸, 그제야 이해하지. 그리고 너는 네 과거 삶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다시 보게 돼.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한눈에 보는 것처럼 말이지."
"그럼… 내가 지금 겪는 이 아픔들, 이 실패들도 결국은 필요한 걸까?"
"물론이지. 생명은 필연적으로 완전함으로 향해가.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고, 운명이야. 설령 지금 너에게 온갖 고통이 따르고, 실패만이 보인다 해도, 그것은 단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너의 영혼이 자라고 있는 증거야."
J는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실수도 많고, 두려움도 많고."
빛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꺼낸다.
"J, 기억해. 속세의 기준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반드시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조용히, 성실히 자기 삶을 다하는 소박한 사람이 더 깊이 성장하는 법이야. 문명 속에서 이익을 위해 신념을 저버리는 사람보다는, 조용히 최선을 다하는 영혼이 더 큰 진보를 이룰 수 있어."
"그럼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나 오래 산 노인도 결국은 같은 길을 가는 건가?"
"맞아. 사후세계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사람마다 달라. 짧은 생을 산 영혼은 짧은 만큼의 숙제를, 긴 생을 산 영혼은 그만큼 많은 성찰의 시간을 갖지. 하지만 결국 모든 영혼은 같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느리든 빠르든, 다만 각자의 리듬으로."
"그래도… 나는 늘 후회가 많아. 왜 그때 그렇게밖에 못 했을까."
"그건 좋은 신호야. 현자들은 그런 반성을 일상의 훈련으로 삼았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있었는가’,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묻는 것. 그런 자각이 바로 영혼을 성장시키거든."
J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럼 언젠가는, 나도 지금의 나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거야?"
"정확히 그래. 육신을 벗고 나면, 너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자기 삶을 관찰하게 돼. 잘한 점도 보이고, 아쉬운 점도 보이지."
"좀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느낌일까?
"그렇지만 그건 단지 평가가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준비야. 너는 다시 돌아올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깨달음이야.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결국, 완전함에 이르게 되니까."
"그럼... 결국 모두가 완벽해지는 날이 오는 거야?"
"그렇지. 가장 가난한 이도, 세상에서 잊힌 이도, 위대한 성인도 모두가 같은 별을 향해 걷고 있어. 생명은 본래 불멸이니까. 우리는 영원히 성장하고, 결국은 완전에 도달하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