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는 형벌이 아니라 성장의 초대장
찬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강변. 얇은 서리가 풀잎 끝에 내려앉아 은빛으로 반짝였고, 바람은 아직 매섭지 않지만 손끝을 차갑게 스쳤다. 마른 갈대들이 서로 부딪히며 바스락거렸고, 강 위에는 희뿌연 김이 피어올라 고요한 대기를 채웠다. J와 빛은 강둑을 걸었다.
J는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정직하게 산다는 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아. 때로는 거짓이 더 편하고, 남 탓하는 게 더 쉬워 보여.”
빛이 답한다.
“맞아. 인간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에겐 잘못이 없다.’는 착각이야. 그 생각이 마음을 가두고 고통을 불러오지.”
J는 바로 대답한다.
“그럼 솔직해진다는 건 결국,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거네.”
빛은 강의 끝을 바라본다.
“그렇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반타작만 해도 행운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늘 자신이 옳다고 믿고, 실수는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지. 어쩌다 한번 맞은 일을 크게 부각시키며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세뇌를 해. 그게 바로 자기기만이지.”
빛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옳고 타인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쓰는 대신, 문제가 나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지.”
바람이 불자 낙엽이 공중으로 날려 강물에 떨어졌다. 잠시 물 위에 머물던 잎은 이내 물살에 휩쓸려 흘러갔다.
J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만 내 잘못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걸까?”
빛이 잠시 생각한다.
“두려움 때문이야. 잘못을 인정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다는 두려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을 직면할 때 마음은 단단해지고, 카르마도 조금씩 녹아내려.”
J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마........., 결국 내가 피하고 싶은 약점, 그게 곧 내 과제라는 거지?”
빛이 곧바로 말한다.
“그래. 잘못을 부정할수록 그 과제는 더 무겁게 다가와. 하지만 인정하면, 적어도 착각의 족쇄는 벗을 수 있어. 자연의 법칙도 그래. 그 법칙을 인간이 위반하면 고통이 찾아오지. 하지만 자연은 우리를 벌주려는 게 아니야. 다만 스스로 조화를 깨뜨린 대가를 되돌려줄 뿐이지.”
J는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자연은 늘 자기 길을 가고, 문제는 인간이 자기 고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네.”
빛이 J를 쳐다보며 말한다.
“자연은 인간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아. 계획을 바꾸지도 않아. 자연은 인간의 비위에 맞춰 계획을 바꾸는 법이 없어. 결국 우리가 자연을 따라야 해. 정신을 지혜롭게 쓰라고 두뇌를 준 건데, 엉뚱한 데 쓰면 스스로 고통을 부르는 거지. 정신을 활용하는 방법은 인간이 스스로 익혀야 해. 정신의 힘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고통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어.”
강 건너편 숲 위로 겨울철의 짧은 햇살이 기울며 붉은빛을 흩뿌렸다. 빛은 잠시 눈을 감고 그 빛깔을 음미하듯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기억해. 카르마는 언젠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야. 그건 우리에게 가하는 자극이지. 인간의 나약함이 계속 쌓이는 것이 카르마야. 우리가 약점을 극복하고 힘을 기르지 않는 한, 카르마는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그것은 형벌이라기보다, 성장의 초대장이야. 우리가 거대한 우주의 무한한 지혜 앞에서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때까지 성장의 프로그램은 지속돼. 우주는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 하지. 그 균형을 찾는 게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야.”
“나쁜 카르마는 수천 년에 걸친 타협의 산물이야. 올바른 신념을 저버리고 영혼을 팔아먹은 행위에 따른 대가지. 카르마는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총합이야. 나쁜 카르마가 어디에서 탄생했는지 알고 싶다면 전쟁과 약탈로 점철된 역사책을 펼치면 바로 나오지. 물론 인류의 어둡고 우울한 역사 속에서 똑바로 현실을 보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기록도 있어. 하지만 밝음의 역사보다는 어두운 타협의 역사가 더 지배적이지. 그래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짐, 마무리해야 할 과제를 한 움큼씩 짊어지고 있는 거야. 우리가 망친 역사는 우리 손으로 바로 잡아야 해.”
J는 살짝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한테 필요한 건 솔직함이네. 잘못을 남 탓하기보다, 우선 나부터 돌아보는 것.”
빛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한다.
“그래. 심지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판명되더라도, 혹시 내 잘못이 있을지 모른다고 가정하면 훨씬 자유로워져. 완벽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니까.”
J의 표정이 밝아졌다.
“빛, 듣고 보니 결국 카르마도, 성장도, 다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끌려는 길 같아.”
빛도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렇지. 인간이 창작한 여러 이야기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해 고생하는 파우스트도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잘못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 주어지지. 중요한 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결국 그 기회를 붙잡을 의지와 용기야.”
J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강바람은 차가웠지만, 가슴속에는 묘한 따스함이 번졌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두려움이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아니라, 마주해야 할 이유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