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릴 적 겨울에 제 손은 늘 거칠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트지 않으려면 깨끗이 씻고 로션을 정성껏 발라야 하는데 저는 대충이었지요. 저는 친구들이랑 조금이라도 빨리 놀고 싶어서요. 대문밖에서 놀자고 외치는 친구 목소리가 들리면 반찬은 생략하고 숟가락으로 밥만 허겁지겁 입안에 퍼넣고 뛰어나가곤 했지요. 친구와 함께 하고픈 ‘마음의 속도'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밥을 먹으면서 넷플릭스를 봅니다. 직장 동료와 대화 중에도 스마트폰을 꺼내 시시한 문자를 보냅니다. 유튜브의 재생 속도는 1.25배나 1.5배로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영상을 차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못합니다. 재생 시간이 몇 초 안 되는 ‘쇼츠'가 딱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 한 편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것도 마음의 속도 때문입니다. 현대의 삶은 바쁩니다. 원래 아날로그여야 하는 삶이 디지털의 속도를 강제받기 때문입니다. 펜을 들고 글씨를 쓸 때 놀랍니다. 머릿속 생각에 비해 써나가는 펜의 속도가 느린 탓에 글씨가 뭉개져서요. 마치 학부모 계주에 참가했다가 넘어지는 어머니 같은 상황이랄까요. 아이들 운동회에 가보면 학부모 계주를 할 때 꼭 한 명씩 달리다가 넘어지는 어머님들이 계시더군요. 빨리 뛰고 싶은 마음의 속도가 몸의 속도보다 빨라서 그런 것이지요. 제가 딱 그 상황이 아닌가 싶더군요.
더 큰 문제는 어른의 ‘마음의 속도'는 다분히 맹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어릴 때 ‘마음의 속도'가 올라가는 것은 ‘충만함'을 위해서입니다. 친구를 만나 함께 노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서지요. 하지만 우리가 종종 ‘바빠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하는 여러 분주한 일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바빠서'가 아닙니다. 대화를 끊고 보낸 문자 중에 정말 촌각을 다투는 일은 드뭅니다. 저는 그게 마음이 ‘허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잠시라도 바삐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우리 마음속으로 번져가는 ‘공허함'이 싫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맹목적으로 높인 ‘마음의 속도'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 덧없게 만듭니다. 속도를 늦추어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재미, 소중함 등의 감각을 모두 놓쳐 버리니까요. 그래서야 일상에서의 충만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을 던져두고 식사에 집중하면 생각보다 음식에 다양한 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료 집어넣듯 허겁지겁 먹을 때는 단맛, 짠맛, 매운맛 밖에 못 느끼는데 말이지요. 기계에 석유 부어 넣듯 마시는 커피 말고 자신이 직접 원두를 갈아 정성껏 내린 커피를 천천히 마시면 그 안에 풍부한 향과 맛이 있음에 놀라게 됩니다.
다시금 모든 일이 요청하는 ‘시간'에 귀 기울입니다. 모든 일에 합당한 시간을 투여하기 위해서요.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가 그랬다지요.
“나태함이야말로 창의적 통찰과 상상력의 열쇠다. 쉼 없는 활동은 인간을 정신세계에서 추방하고 본능적으로 늘 움직여야 하는 동물의 범주에 들게 한다.”
주말에 노트에 만년필로 글을 쓰면서 새삼 느낍니다.
마음의 속도가 빨라졌구나.
어쩔 수 없긴 합니다. 우리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느리게 달리면 주변에 민폐입니다. 주변 차들의 속도에 맞춰 가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고속도로에는 졸음쉼터도 있고 휴게소도 있습니다. 쉬지 않고 너무 달려서 엔진이 타버리고 브레이크 라이닝이 모두 닳아버리면 목적지에 도착 못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주말에는 마음의 속도를 낮추고 모든 일에 나름의 시간을 내주어야겠습니다.
조금 나태해질 생각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