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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지언

- 틀린 말은 아니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

by 강호

모임이 많아지는 연말입니다. 저는 늘 연말이 되면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나 자주 인사 못 드렸던 어른들을 만나곤 했는데요, 올해는 가급적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조금만 이야기를 해도 마치 풍선을 심하게 불면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어지럽거든요. 성대가 맞붙지 않아서 말을 할 때 공기가 많이 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전 직장 동료분들과는 만날 수밖에 없었어요. 저랑 퇴사를 같이 한 ‘퇴사동기’이자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 저를 지도해 주었던 사수분이 있는데요, 그분이 너무나 보고 싶다고 하셔서 도저히 모임을 미룰 수가 없었거든요. 합정 근처의 삼겹살 집에서 4명의 전 직장 OB들이 만났습니다. 말을 많이 할 수 없어도, 듣고만 있어도 반갑고 즐겁고 그랬습니다.


근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뭔가 좀 찜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보다 한 살 위 선배 형님의 표정이 맘에 걸렸어요. 늘 푸근한 표정이었는데, 그날따라 계속 어딘가 굳은 표정이었던 겁니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다가 아뿔싸! 후회를 했지요. 제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그 형님이 조금은 해탈한 듯 이제 머리가 자꾸 빠지는 것 같다고 했을 때, 제가 그랬거든요.


“형님, 그거 더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그냥 가발 쓰세요. 유명한 정치인도 그렇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회사 대표도 그렇고 다 가발이에요. 지금 써야 사람들이 가발인 줄 몰라요. 머리 다 빠지고 난 다음에 가발 쓰면 사람들이 다 알잖아요.”


그 자리에서는 몰랐는데, 집에 오며 생각해 보니 무척 기분 나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가 빠져 고민인 사람에게 공감해주지는 못할지언정 놀리는 꼴이 되어 버렸던 거예요.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비하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제가 그런 짓을 한 셈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그 형님은 사람 좋게도 그 말을 할 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아서 정말 제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여하튼 저는 찜찜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상인지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입니다. 제가 그 형님에게 한 말도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아직 머리가 많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머리숱이 많지 않아서 언젠가 머리가 많이 빠질지도 모르니 각오해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가발은 미리 쓸수록 좋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요. 그게 상처가 되는 말일 수 있겠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른이 될수록 정말 못된 욕을 하거나 공갈협박 같은 것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그래서 그런 욕이나 협박 같은 것으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지요. 그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 되거든요. 아주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 그러니까요.


정말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친구나 지인이 건네는,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심코 뱉은 말입니다. 대다수의 어른들은 대범한 척 하지만 실은 늘 상처 주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가벼운 대화에도 ‘상인지언’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늘 살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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