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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l 21. 2021

열무김치, 씻어먹던 여름 맛


석빙고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엔 차가운 물이 해답이었다.


길에서 저만치 들어가 자리한 학교 뒤에는 거무스름한 전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아이들이 점심때에 차갑고 맛있게 마시려고 아침부터 미리 우유를 담가 두는 냇물이 있었다.


빨간머리 앤 만화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등굣길 작은 개울에  우유를 담가 두는 장면을 보고 찾아낸 문장이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캐나다 모습이나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내 어린 시절 여름 풍경이나 다를 바 없어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그 시절 동네 가운데 우물물은 조금씩 옆으로 새어 나오는 모양새다. 졸졸 흘러나오는 물들이 모여 도랑으로 가기 전 작은 웅덩이를 이룬다. 겨울엔 그곳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여름날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 냉장고 역할까지 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하며 이 글을 쓰는 나를 나이 많은 어르신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아무리 시골이라도 70년대 후반에 이르면 거의 전기가 들어가 냉장고를 가진 집이 생겨날 즈음이지만 또 그 시절이라 웃지 못할 이유로 전기가 없는 우리 동네 같은 곳도 있었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깃줄을 설치하다 자재가 모자라 신작로를 중심으로 윗동네는 전기가 들어가고 아랫동네는 전기가 들어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수박, 참외 같은 과일은 동네 식수의 원천인 우물 안에 담가 놓는다. 두레박을 퍽! 넣으면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가랑가랑 울리는 깊은 우물이 아닌 우리 동네 우물은 초록 이끼가 송송 끼어 있는, 지금 생각하면 나지막한 제법 낭만적인 우물이었다. 작아도 그 시절 동네 기운처럼 활기차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동네 구심점이 되어 빨래도 하고 채소, 생선도 씻고, 요즘 같은 찌는 듯한 대낮엔 밭일 마친 나이 든 여인들이 웃통을 홀랑 벗고 등목을 하던 곳이다. 어린 나를 항상 불러 등에 물을 붓고 문지르게 했던 큰어머니의 땀띠 난 오돌토돌한 살의 감촉을 손끝이 아직도 기억하다니!


우물물이 모인 웅덩이엔 작고 검은 옹기 항아리가 여럿 담겨 있다. 끼니때가 되면 각 집에서 보시기와 젓가락을 들고 주로 (어린, 젊은, 늙은) 여자들이 어슬렁 한 명씩 나타난다. 주인만이 알고 있는 항아리 뚜껑을 열면 검정 고무줄로 둘러싼 하얀 옥양목 천 2차 뚜껑이 나오고, 그걸 벗기면 김치 삭은 냄새가 온 새밋가에 푹 터진다. 거의 같은 내용물인 열무김치를 한 보시기씩 꺼내어 이미 평상에 차려져 있거나 차릴 여름 밥상을 향해 느리게 걸어간다. 국물이 흐르거나 엎어지면 안 되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서 모두 느린 걸음이었던 것 같다. 차가운 새미 물에 담겨 하루하루 건강하게 삭아가는 열무김치는 새콤하고 시원했다.


열무김치 항아리가 끼니때만 열리느냐면, 어른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 조용한 대낮에 그것을 탐하는 손길이 있었으니….

쑥 들어간 우물가 위 집이었던 큰집 손녀, 그러니까 내 종질녀(어렵다, 쉽게 큰집 큰오빠의 딸)랑 난 두 살 터울로 소꿉친구라 마당을 드리운 감나무 그늘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슬슬 새미가로 내려와 태연하게 이집저집 항아리를 열기 시작한다. 감나무 매미는 더 울어 재낀다.

우앗! 짜!

맛이 이상해...

이건 너무 시다!

이래저래 맛보느라 꺼낸 여러집 김치를 물에 훌렁훌렁 씻어 먹는 악동들! 온데 쑤신 항아리들은 제대로 돌려놓기나 한 건지, 분명히 주인이 보면 헤집어 놓은 상태를 알건대 어른들로부터 그 짓으로 야단맞은 기억이 없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김장김치가 일찍 떨어져 저장배추, 고랭지 햇배추로 유지하다가 때이른 더위에 열무로 마침내 갈아타기 시작했다. 딱히 깊은 맛은 없으나 아삭한 열무김치는 여름의 맛이다. 한날, 급 허기에 보시기에 담아내기도 전에 짠 열무김치를 아구아구 먹어댔다. 입안에 가득 퍼진 알싸한 풋내는 씻어먹었던 그때의 열무김치를 불러낸다.

열무김치에 관한 한 변한 건 없구나.





* 새미 - 우물의 방언

* 마지막 문장은 노벨상 작가 엘리스 먼로 단편 <아문센> 속 문장 ‘사랑’을 감히 ‘열무김치’ 로 패러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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