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남과 오영수

노년의 생각

by 여름지이



선택하지 않은 자본주의 세상은 공기 같은 환경이 되었다. 공기도 공격을 하는 시대이지 않나. 몇 년 전에 본 ebs 다큐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둘러싼 세상을 아이들 '의자 앉기 놀이'에 비유하며 살아남은 두 사람이 마지막 하나뿐인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빙글빙글 도는 살벌한 장면을 연출했다. 며칠 동안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계속 이야기할 정도로 자본주의 실체가 공포스러웠지만 또 잊고 살았다. 영화<오징어 게임>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감독이 그 다큐에서 영감을 얻었나 싶을 정도로 소재가 된 옛날 아이들 놀이는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요란한 흥행 소식이 아니었으면 결코 보지 않았을 피가 난무하는 영화는 경악스러웠으나 모처럼 끝까지 보는 몰입감을 주었다. 시즌2가 벌써부터 기대되니 말이다.


세계가 열광하는 우리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삶의 끝자락에 내몰린 서바이블 경기 참가자 456명 중, 1번 오일남이라는 인물과 그 캐릭터를 연기한 오영수라는 배우가 계속 뇌리에 남아 뭐라도 적고 싶어 졌다. 무명 연극배우를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낯선 얼굴, 담백한 연기, 주변에 있을법한 그 연배 남자 노인의 모습 어딘지 어설프고 체념한 듯 한 모습, 그래서 더 캐릭터에 녹아들었던 것 같다. 익숙하고 연기 잘하는 신구 같은 배우가 그 역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잠깐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아니다. 이미 오일남은 오영수였다.


치매로 오락가락하던 노약자가 살벌한 게임의 지배자로 밝혀지는 침대 씬에선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반전은 늘 흥미롭다. 불쌍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불행한 노인이었다니, 그리고 악인의 모습에서 보이는 한없는 쓸쓸함은 허무였다. 마지막 생존자 456번(이정재 分)이 왜 이런 일을 벌였냐고 절규하자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뭘 사고 먹고 마셔도 다 시시해져 버려.

재미없고 시시해져 버린 세상살이 전환을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을 시작했단 말인가. 세상과 이 노인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길래 가면을 쓴 괴물로 변한 것일까.

정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오일남은 주인공 못지않은 무게감으로 그동안 익숙한 노인 이미지를 천천히 부수며 이야기 속 자기 자리를 단단하게 지켜갔다.




배우 오영수의 삶은 영화 캐릭터와는 반대 방향으로 멀리 가 있었다.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54년째 연극계에서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며 연기자로서 길을 묵묵히 가던 또 다른 대중에 가까웠다. 일찍 빛나지 않았기에 자기만의 색깔로 연기를 갈고닦을 수 있었고, 결국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내공이 쌓여 이제야(77세) 발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내 의식의 흐름대로 표현해도 오일남과 맞아떨어질 때가 많았다는 그의 말은 티끌모아 태산 같은 시간이 쌓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경지다. 젊어서 부리던 소유욕이 나이 들면 없어져 자연스러운 ‘나’만 남는 인생의 순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했지만 자연스러운 나가 제 각각이니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노년이 되었다고 남은 인생 길이를 감지하고 내려놓는 생활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묵묵히 걸어온 외길 삶이 어느새 구도求道가 되어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다


몰려드는 광고, 특히 깐부치킨 광고를 거절한 이야기는 연기 인생에서 얻은 그의 인생철학이 얼마나 몸에 배어 있는지 보여준다. 자본주위 꽃, 광고는 어쩌면 대중 예술인에게 최종 목표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흔하고 당연한 일인데 이 노인은 영화의 의미가 흐려질 것 같다고 정중히 고사했다. 돈을 주는데 왜 안 하냐고 주변에서 의아해했지만 작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광고, 공익성이 있는 광고에만 출현할 수 있다고 하신 답니다! 돈이 너무 많아 인생이 시시해져 버린 오일남과 달리 오랜 시간 무명으로 살았어도 자존심과 자긍심을 지키며 여전히 인생이 시시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연기에 기력이 있어야 해요. 또 말과 말 사이에는 침묵의 언어가 있어요. 그것을 내공으로 살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호흡이에요. 연기의 기본은 기력과 호흡이 아닐까 생각해요. 좋은 연기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관객에게 잘 전달해서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하고요.

평행봉을 하며 88세까지 연기를 하고 무대를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는 지금도 사람의 아름다움을 잘 가꿀 줄 아는 것 같다.

자본주의 끝판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알게 된 오영수 배우의 황금만능에서 멀찍이 벗어난 절제된 삶, 더욱 빛나 보인다.




* 경향신문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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