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Jul 07. 2022

마녀 수행

서쪽 마녀가 죽었다/ 나시키 가호


삼대가 함께 살던 시절, 조祖가 손孫에게 (자식에게 하듯) 가르치려 할 때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불편함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조부모는 손주들에게 사랑만 듬뿍 주는 자리구나.


그런데, 사랑스러운 손녀딸이 길 잃은 양이 되어 비까지 흠뻑 맞은 꼴로 내 품에  찾아든다면?

꼭 안아 보슬보슬 털도 말려주고 배고프지 않게 먹여서 가던 길을 가게 해주어야 한다.

안아주고 털 말리고 몸의 배고픔은 해결해 주겠는데 가던 길을 가게 하는 용기는 어떻게 북돋을 수 있을까. 숨 죽은 영혼을 다시 부풀리는 일은 쉽지 않다.



마이의 외할머니는 영국인이다. 할머니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외고조부가 그 옛날 메이지 시대에 일본으로 여행을 온 것이 색다른 가족사의 시작이다. 일본에 대한 호감은 대를 이어 손녀딸(마이 할머니)이 먼 나라에 영어 교사로 지원해 가는 결과를 낳았고, 같은 학교 과학 교사랑 결혼하여 후에 마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마이 엄마는 혼혈이고 마이에게도 영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막 중학교에 올라간 마이가 집단 따돌림으로 등교 거부를 하는 일이 생긴다. 엄마에게도 지난 시절을 떠올리는 불편하고 난감한 상황이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 잠시 비를 피하는 마음으로 마이를 시골 할머니 집에 보내게 되는데, 산딸기가 익고 신록이 절정을 이룬 그해 초여름은 그렇게 상처 입은 마이와 할머니의 특별한 시간으로 새겨진다.

마이는 할머니에게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마녀였고 자신에게도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다는 마녀의 초능력은 예지력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노래를 잘 부르거나 계산을 특별히 잘할  수 있는 것처럼 예지력도 하나의 능력이라 고조할머니가 다른 공간에 있는 고조할아버지 목숨을 구한 이야기는 마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직은 그 능력이 없지만 수련하여 어려운 학교 생활을 매끄럽게 하고 싶어 졌다.

할머니, 나도 노력하면 그 초능력이라는 게 생길까?




마녀 수행의 기본은 정신력!

할머니가 말하는 정신력은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안테나를 세워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마이는 기초체력 같은 의지력을 키워야 했는데, 일상을 벗어난 중학생 소녀가 의지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은 주변에 널려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 밥 잘 먹고 운동하며, 규칙적인 생활하기 등 지금 마이에게 자발적으로 요구되나 가장 안 되는 일, 생활 그것이었다. 조금 거창하게 좌선이나 명상 같은 걸 생각했던 마이는 실망스러웠지만 자신을 돌아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단단하지 못한 마음에 명상으로 의식이 몽롱해지면 오히려 악마가 들어오기 쉽다고 속삭이는 할머니 말은 또 무엇인고?


마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스스로 결정하기

훈련된 마녀는 의지력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보이고, 듣고 싶다고 생각하면 들려야 된다. 보려고 하지 않는데 뭔가 보이고 들리는 것은 위험하고 불쾌한 일이다. 모든 일은 흐름에 따른 올바른 소원이 빛으로 변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이 멋진 능력이 할머니에게도 있느냐고 묻는 마이에게 할머니의 대답은 의외다.

아침에 일어나지? 밖이 아직 어두운 계절이 있는가 하면 요즘처럼 이른 새벽부터 태양이 떠올라 환한 계절도 있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하고 느끼지. 물을 끓이고 차를 준비하고 밖으로 나가 초목을 감상해.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식물이 묵묵히 싹을 틔우기도 하고 봉오리를 맺기도 하고, 새로운 새싹이 아침 햇빛에 맑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단다. 정원은 매일 변하는 거야. 그리고 일을 하지. 난 그런 매일 이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변화를 미리 안다는 것은 나에게 서프라이즈의 즐거움을 빼앗는 거야. 그래서 필요가 없단다. - p81 -


마녀는 충분히 살기 위해서 살아 있을 때부터 죽는 연습을 한다.

늘 계란을 주던 닭이 하루아침에 갈기갈기 찢긴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날, 마이는 그동안 밤마다 블랙홀처럼 자신을 잠식했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머니에게 살며시 묻는다. 마음을 가다듬은 할머니는 죽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일순간 마이의 긴장감을 녹였지만 사실은 자칭 죽음 전문가였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는다는 것은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몸을 벗어나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몸이 일회용이라면 영혼은 오래오래 여러 몸을 여행하기 때문에. 몸의 감각은 영혼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도 구름 위를 걷게도 하는 요상한 것이지만 그런 체험들은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성장은 영혼의 본질이었다. 봄이 되면 싹이 나고 그 싹이 햇빛을 향해 뻗어 나듯이.

이런 영혼과 몸을 분리하는 연습은 죽음의 본질을 닮았고 상급 마녀가 외부 자극에 결코 동요하지 않는 방법이다. 마이는 성장 같은 건 안 하고 싶다고 화를 내지만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어리가 거두어진 듯 기분이 가벼워진다.


마녀는 자신의 직관을 소중하게 여겨야 되나 그 직관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할머니 집 근처에 사는 겐지 씨는 마이에게 눈의 가시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태도 등 여러 가지로 불쾌한 사람인데 언제나 짖어대는 그 집의 개들까지 닭을 헤친 범인인 것 같다. 마이는 짐작한 사실을 할머니에게 알리지만 할머니는 직관을 경계하라며 마이의 마음에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 서투른 많은 마녀들의 어설픈 직관은 망상을 낳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망쳐 버린다는 무서운 경고까지 했지만 마이의 의심은 마침내 겐지 씨가 할머니 땅을 뺏으려 한다는 단정으로까지 이어져 두 사람은 크게 부딪히고 만다.


상급 마녀임을 자처하던 할머니도 결국 외부 자극에 동요되고 말았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마음의 중심을 잡고자 애쓴 한 여성일 뿐이었을까.

“할머니는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지만, 나는 왠지 할머니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이의 이 직관은 할머니의 강인한 정신력이 오히려 누구에겐 상처가 되기도, 누군가는 흡수하는 부모 자식 간의 운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애처로운 마이의 학교생활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아빠가 마이를 데리러 오면서 분기점을 맞는다. 아빠는 혼자 생활하고 있던 직장 부임지에 세 가족이 모여 살면 어떻겠냐고 마이에게 제안했고, 마이는 받아들인다. 새로운 학교를 신참 마녀의 비밀스러운 수행 장소로 둔갑시키기로 마음까지 먹으면서. 어찌 수행이 잘 되었는지 마이는 친구도 사귀고 예전보다 훨씬 순조롭게 학교에 적응해 간다. 안정을 찾을수록 마이는 할머니와의 연결을 잊지 않으려 마녀 수행을 되새긴다. 그것은 마지막에 겐지 씨의 일로 마녀가 아닌 인간 할머니를 유출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이고 그리움이었다.

할머니는 서쪽, 마이는 동쪽에 살아 2년 동안이나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는데, 서쪽 마녀의 영혼이 몸을 탈출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시 찾은 그 여름 할머니 집에서 마침내 마이는 올바른 소원이 빛으로 변해 실현되는 마법을 경험한다.

서쪽 마녀로부터 동쪽 마녀에게. 할머니의 영혼 탈출 대성공!


죽음을 체험하고 알려주겠다던 할머니의 약속은 유리창에 나타났으며 흐르는 눈물과 함께 할머니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불교적 세계관에 가까운 마이 할머니의 마녀 수행에 동참하느라 조금 버거웠다. 여름이면 생각나고 예전에 가볍게 읽은 책이라 시작했는데 읽기와 쓰기는 가끔 서로를 배반하여 쓰기가 가볍지만 않았다. 삶과 죽음, 관계 등 묵직한 주제를 사춘기 소녀에게 일상의 언어로 쉽게 말하려는 할머니(사실은 작가)한테 감화되다가도 내면 아이는 어느새 올라와 마이처럼 성장 같은 건 안 하고 싶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딸, 아내, 엄마를 거쳐 이윽고 할머니가 된, 외국 땅에서 일생을 마친 강인했으나 어쩌면 무지 외로웠을 한 여성이 남았다. 마음먹은 대로 살다가 영혼 탈출에 성공한 타샤 튜더 할머니를 닮은.


마음 수행에 집중하느라 할머니의 자연주의 살림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를 못했다. 자연의 변화 앞에서 매일 이외에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다는 할머니의 여름은 마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을 일으키기에도 충분했다. 영혼과 몸이 분리되면 더 이상 마이가 아니기에 살아있다는 건 한쪽만 성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산책길에 할머니 의식주 생활에 포인트를 줬던 식물들이 내 여름까지 싱그럽게 한다.

좌측부터 산딸기, 오레가노, 라벤더

이것들로 할머니는 무엇을 했을까.

마이 할머니는 남달랐다.








*서쪽 마녀가 죽었다/ 나시키 가호/ 비룡소, 2014

* 영화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 2008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식구가 밤마다 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