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토너>를 읽고
주인공 이름이자 제목인 <스토너>는 한 남자의 내밀한 삶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남 얘기만큼 하기 쉬운 것도 없고, 남의 인생살이 듣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여도 이 소설은 끝까지 가는 힘이 있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났을 때 잔잔한 영화 한 편을 본듯한 감동이 밀려온다면, 5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역주행하게 된 소설의 의미가 다가온 것이다.
스토너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에 우유부단하며 인내만이 미덕인 듯, 어찌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이나 애착이 없어 보인다. 달리는 차가 가로수를 맞아들이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의 인생은 어떤 계획이나 성취 그래서 생겨나는 절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첫 단락은 당신이 얼마나 주목받지 못한 존재였는지 소개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미주리 대학의 영문과 교수가 되었지만 학자, 동료, 스승으로서 좋은 평가나 이룬 것은 없었다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딱 좋은 설정일지라도.
그런데
인생에 ‘실패’라는 단어를 쓰는 건 너무 가혹하여, 짠하고 슬프기까지 한 이 분의 삶이 정말 회색빛이기만 했을까, 생각해 본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행복과는 거리가 멀지만 딱히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때리는 사람보다 두들겨 맞는 사람이 왠지 승자처럼 보이는 그런 아우라가 있는 그의 삶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2년의 간격을 두고 다시 읽은 <스토너>는 내가 변한 만큼 그도 다르게 다가왔다.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더러 맞기도 하는 요즘, 마치 큐브 맞추기에서 한쪽을 맞추면 다른 쪽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세상은 갈수록 모르는 일 투성이라 때로는 무기력해지는 어른이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당신은 왜 소리치지 않나요?, 소리치고 싶은.
그럼에도 검은 숲 사이로 아른거리는 한줄기 빛을 인식하는 일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고 그러니 되돌릴 일이 무엇이 있겠냐고 환기시켜 주는 것 같다. 또 애초에 인생이라는 큐브에는 여섯 면이 각각의 색으로 완성되는 일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고, 가끔은 멈추어 보는 것이 계속하는 것보다 매우 어렵지만 시도해 보는 건 어떻냐고도 말이다.
특이하게도 이 책은 1965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나 이듬해 절판이 되었다가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30여 개 나라에서 출판되어 오히려 더 순항하고 있는 책.
알고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삶은 없으나 평범함으로 뭉뚱거려지는 개인의 이야기가 그때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지금 반짝이는 건 그만큼 우리네 삶이 위태롭다는 뜻은 아닌지. 점점 사람의 쓸모는 줄어드는데 오래 살고 있지않나. 식당에서도, 말동무도, 감정 없는(감정이 생기면 더 문제지만) 기계가 소용되는 시대, 사람은 어디에 머무르며 무슨 일에 의미를 밝힐까. 나로 살아서 의미가 된 이야기, 한 사람이 또렷한 이야기가 그리운 거다. 스토너는 스토너일 뿐인 것처럼.
단지 농사일을 잘하기 위해 군청직원의 권유로 농과대학에 진학하게 된 스토너에게 영문학에 대한 열망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교양인 영문학 개론 시간, 아처 슬론 교수의 시니컬하고 괴짜 같은 태도는 마치 문학이라는 마법을 스토너에게 걸기 위한 퍼포먼스 같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73을 두 번이나 읊은 아처 슬론은 무대 위 배우처럼 질문한다. 하필 그에게만 여러 번.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강의가 끝나고 스토너는 어느새 다른 사람이 되어 캠프스를 걷고 있었다.
문학은 당장 쓸모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다음을 생각하게 한다. 농사일이 아닌 문학에서 길을 찾은 스토너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나아지거나 기쁜일이 없어도 관조하듯 담담하게 살았다.
소설에서 윌리엄 스토너가 살았던 시대(1900년대 상반기)에 현실에는 같은 이름의 윌리엄 볼콤(wiliam bolcom)이라는 현대음악가가 있었다. 그의 대표곡 중 '우아한 유령'이라는 재즈와 클래식의 중간쯤 되는 음악이 그려졌던 소설의 분위기랑 닮아 올려본다. 여러 버전 중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슬프고 우아하나 담담한 연주.. 스토너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흐르는듯 하다.
https://youtu.be/hwrImDWsqgQ?si=IqjavwJSPODKq2L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