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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l 12. 2021

 풀밭 대화

토베 얀손의 단편집 <여름의 책> 중, <풀밭> 각색


할머니,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겼어?

저기 저 풀밭 같을지도 몰라.


둘은 길가의 풀밭을 지나가다가 서서 바라보았다. 더운 날이었다. 큰길은 하얗게 말라 곳곳이 갈라져 있었으며, 도랑 옆에서 자라는 풀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풀밭 안으로 들어가서, 먼지라고는 없는 높은 풀 사이에 앉았다. 블루벨과 적설초와 미나리아재비가 가득했다.


천국에도 개미가 있을까?

아니.

할머니는 대답을 하고 조심스레 하늘을 향해 누워서, 모자를 덮고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해 보았다. 소피아는 꺾어서 들고 다니던 꽃이 시들어 물렁거리자 할머니에게 주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챙겨?

아주아주 지혜로우니까. (웅얼웅얼)

제대로 좀 대답해 봐. 어떻게 하냐고!

비서들이 있지.

하지만 문제가 생기기 전에 비서들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면, 사람들이 기도하는 걸 어떻게 다 들어?

누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들을 때까지 아무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셔.

소나무에서 떨어지면서 공중에서 기도하면 어떻게 돼?

하하. 그럼 나뭇가지에 걸리게 하지.

똑똑하네. 이제 할머니가 물어봐. 하지만 하늘나라에 관한 질문만 돼.


천사들은 자기네가 무슨 종류인지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드레스를 입는다고 생각하니?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뭐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해? 들어 봐. 다른 천사가 무슨 종류인지 알고 싶으면, 그냥 그 천사 아래로 날아가서 바지를 입었나 보면 되지.

음. 그렇겠네. 이제 네 차례야.


천사들은 날아서 지옥에 가도 돼?

물론이지. 거기 가면 친구와 친지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어제는 지옥이 없다고 했잖아!

할머니가 화가 나서 일어나 앉아 말했다.

오늘도 생각은 그대로야. 하지만 이건 그냥 놀이잖아.

놀이 아냐.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건 진지한 일이지.

하느님은 지옥을 만드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당연히 했지.

아냐, 안 했어.

했어! 크고 어마어마한 지옥을 만들었다고!


할머니는 화가 나서 너무 급히 일어났다. 풀밭이 온통 빙빙 돌았고 균형을 잃을 뻔했다. 그래서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소피아, 이건 정말 싸울 문제가 아니야. 다 끝난 다음에 벌까지 받지 않아도 인생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다는 건 너도 알겠지. 죽으면 위로를 받는 거야. 그런 거지.

하나도 안 힘든데. 그리고 악마는 어쩔 거야? 악마는 지옥이 집인데!


할머니는 너무 골을 내지는 않기로 했다. 할머니는 길로 돌아가다가 커다란 소똥을 밟았다. 손녀는 따라오지 않았다.

소피아. 가게에 가면 자파 오렌지를 사 줄게.

자파 오렌지라니. 하느님과 악마 이야기를 하는데 오렌지 생각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


할머니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지팡이로 신발에서 소똥을 파내고는 말했다.

얘야, 나는 아무래도 이 나이에 악마를 믿지는 못하겠구나. 너는 네가 믿고 싶은 걸 믿어. 하지만 관용을 배우렴.

그게 뭔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거지.

존중하는 건 또 뭐고!

다른 사람이 믿고 싶은 걸 믿게 두는 거지! 나는 네가 사탄을 믿게 두고 너는 나를 내버려 두는 거야

욕하네.

안 했어.

사탄이라고 했잖아.


둘은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소 세 마리가 꼬리와 뿔을 흔들며 길을 걸어왔다. 파리 떼와 함께 소들은 마을을 향해 천천히 지나갔고, 주름진 엉덩이들을 흔들며 씰룩거렸다. 그렇게 소들은 지나가고, 침묵만이 남았다.






난 네가 모르는 노래를 알지.

타 랄라, 타 랄라, 소똥 던지지 마라, 타 랄라, 타 랄라, 내가 되돌려 던진다.(음이 많이 틀렸다)

뭐라고? (작은 소리로)

타 랄라, 타 랄라, 소똥 던지지 마라….

아빠는 똥이라고 안 그러는데...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말 안 해.

두 사람은 헛간까지 가서 울타리를 넘고는 뉘본다 씨의 우리를 지났다. 나무 아래에 있는 가게까지 가기도 전에 소피아는 그 노래를 배웠고, 할머니만큼 이상하게 부를 수 있었다.




한때는 소녀였으나 할머니에 가까워져 가는 지금 소피아 할머니의 말이 더 와닿습니다. 그럼에도 내 안의 소녀는 소피아에게 더 떼를 쓰라고 말합니다. 어른들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너무 복잡해. 이렇게 중년의 마음에 공존하는 할머니와 소녀의 마음을 끄집어 내준 작가는 북유럽의 대표적인 캐릭터 ‘무민’을 창조해 낸 ‘토베 얀손’입니다. 무민을 캐릭터로만  알고 있었지 이야기는 읽어보지 않아 작가의 존재가 새롭습니다. 어린이 문학뿐 아니라 소설, 미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는 토베 얀손의 단편집 <여름의 책>, ‘그녀’라고 부르기엔 진부한, 단단한 세상의 틀에 균열을 내었던 그녀의 삶처럼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소피아의 가족, 할머니와 손녀가 섬에서 보낸 여름 한 철은 정말 섬처럼 도드라져 보입니다. 아침 수영, 달빛, 여름 숲, 폭풍, 고양이, 손님… 8월, 까지. 그 해 여름에 그런 일이 있었지, 딱 말하기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여름에 읽는 여름 이야기는 더위마저  있어야할 배경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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