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노란, 겨울 바람꽃

by 여름지이


여행을 목적으로 떠난 건 아니었다.

새벽에 걸려온 아들 도의 전화에 사그라들었던 모성이 데인 다리미 자국 물집처럼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여전히 낯선 땅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마지막 학기 몰아치는 과제와 학습량에 지친 도는 몸에 적신호가 올 만큼 인생 최고의 쓴맛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몸과 함께 내려앉은 마음... 어떤 말보다 집에서 늘 먹던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었다.


알아서 갈 테니 너는 마지막 시험에 집중하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현지 숙소, 기차표 예매는 결국 도가 알아서 한 일이 되었다. 뮌헨 직항이 많지 않아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뮌헨까지 기차로 이동하기, 말이 쉽지 뮌헨 중앙역에서 도를 만나기까지 무려 17~18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다. 이웃나라 전쟁은 비행시간을 두어 시간 더 늘려 놓았다. 마지막 도착지까지 한 숨 자지 못할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떠나기 전날부터 두통이 몰려와 긴장감을 재촉한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오래전 작가 전혜린의 유명한 책 제목이 떠오른 건 우연일까. 하필 가는 곳이 그곳 뮌헨이라니.

최소한의 짐을 꾸렸지만 작은 백팩에 작은 캐리어, 마음만은 두 손 가볍게 출발한다.


코로나가 벌써 옛일이 되어버린 듯 꽉 찬 비행기 안, 이코노미석 중간자리는 어디에 머리를 두어도 편하지 않아 정말 한숨을 못 잤다. 비몽사몽 도착한 낯선 공항의 글자들은 차갑기만 하다. 유심칩을 갈아 끼운 데이터로밍까지 순조롭지 않아(공기 같은 통신이 안된다는 건, 외국에서) 거의 악몽 속에 놓인 듯 허둥댔고, 주변 한국 젊은이 도움으로 겨우 해결했으나 이미 혼이 빠진 상태다. 그래서 악몽은 계속이다. 중앙역 가는 전철 타는 것도 허둥허둥, 뮌헨행 기차를 타긴 탔는데 아무리 끝에서 끝까지 둘러보아도 내 자리 번호가 적힌 의자가 없다.

Excuse me... 도대체 이 자리는 어디 있나요?? 역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온라인 티켓을 보이며 물었다. 음, 담 역에 내려서 앞 기차로 바꿔 타야 합니다…

네에????

알고 보니 내부에서는 절대 연결되지 않는, 두 기차가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기차였다. 아이들 기차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기차를 타본 적 없어 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번엔 정확히 뮌헨 중앙역에 내려 주었다. 허영허영 걸어 나오는데, 어디서 엄마!라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도 얼굴이 들어왔다. 노란 유치원복을 똑같이 입은 아이들 속에서 꼬마 도가 한눈에 들어온 것처럼. 엄마 왜 이렇니? 주저리주저리 고난의 여정을 늘어놓는다. 엄마, 지금 한국에서 한참 잘 시간이잖아. 그렇구나...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맞구나. 꿈속에서 도는 생각보다 얼굴이 초췌하지 않았다. 그러면 됐다.


밥 해 먹을 수 있는 도 기숙사 근처 숙소로 가기 전에 일단 쉼을 위한 중앙역 가까운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2박을 하고 지난한 여정을 감수하고 먼 이국땅에 온 목적, 밥을 위한 숙소로 이동할 것이다.

시차는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하는 걸림돌이다. 토막잠이라도 이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낯선 곳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는 시간은 또 다른 악몽이다. 끝없이 마음은 추락한다. 도대체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지금 이러고 있나, 아이한테 도움은커녕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기운이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온갖 상념은 불안을 불러오고 곤두선 신경은 그나마의 잠을 더 쫓는다. 그럼에도 도사리고 있는 긴장감은 날이 밝아지면 일어나 앉게 하고, 뭐라도 챙겨 먹게 하고 그래서 나는 마음을 추스르려 숙소 바깥으로 발을 뗄 수 있다. 여기서는 열쇠가 중요해, 열쇠를 신줏단지 모시듯 꼭 쥐고서.


도가 꼭 산책하라고 일러준 근처 올림픽 파크 공원은 찾기 쉬웠다. 숙소 건물을 돌아 보이는 개울을 따라가면 나온다 했는데, 반대쪽으로 나왔는지 작은 도로를 건너니 바로 보였다. 공원 입구에서 보니 오른쪽 편에 작은 개울이 있긴 있었다. 그럼 나중에 돌아갈 때는 저 길로 가야지 마음먹으며 입구부터 큰 물줄기가 시원하게 흐르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에 큰 호수를 낀 광활한 공원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1972년 비극의 뮌헨 올림픽이 개최된 곳으로 잠실 올림픽공원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압도적이었다. 백조와 오리들이 노니는 맑디맑은 호숫가를 걷고 제법 높은 능선에 올라 끝없이 이어지는 공원과 뮌헨 시내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여긴 봄이구나. 벌서 키 작은 초록 풀들이 온데 푸른 잔디처럼 파릇파릇하다. 잔뜩 움츠려 들었던 마음이 풀리는 듯 조금 가벼워진다.


돌아가기 위해 개울 옆 오솔길로 들어서자 빨려 들어가 듯 발걸음도 이젠 가벼워진다. 폭신한 낙엽길을 감싸는 야생의 기운 그리고 펼쳐진 이른 봄꽃들의 향연, 작은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스노드롭(설강화), 크로커스, 복수초를 닮은 노란 겨울바람꽃이 지천이다. 그래, 너희들 보려고 여기를 왔구나! 기운 내야지... 낼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