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보게 된 건 그날 햇살이 한몫했을 것이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도가 살고 있는 기숙사로 갔다. 한 번 따라가 본 적 있어 쉽게 찾아갈 뻔했지만, 여기서는 쉬우면 안 된다. 난 지금 여행기를 쓰고 있고 사건이 있어야 하지 않나, 로 자위해 본다. 기숙사 역을 학교역으로 착각하고는 갔다가 다시 돌아 돌아갔다. 오전에 자고 있는 아이 귀찮게 안 할 거라고 혼자서 작당하다가 저지른 실수다. 다행히 역들의 간격이 짧아 큰일은 아니었다. 서울역에서 양평을 가려다 일산에 가버렸으면 큰일이지만 종로 3가 가려다 충무로쯤 간 거라 어이가 없었지만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사이 거의 학기가 마무리된 도에게 여유시간이 생겨 덩달아 기분이 가벼워진 탓에 어디든 가고 싶었다.
그날 뮌헨 날씨는 온 이후 가장 따뜻하고 하늘이 푸른 날이었다. 전철역에 내려 기숙사 가는 들길을 걸으며 전화를 했다. 막 일어난 목소리로 날도 좋은데 밖에서 샌드위치를 먹겠다며 나오겠단다. 오호, 이런 기특한 일이... 별것도 아닌 것에 감동을 잘하는 나는 이런 사소한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몽상가다. 하얀 애기 데이지꽃으로 덮인 들판이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 도를 기다렸다. 옆에는 샌드위치통과 오다가 산 주황색 귤 봉지도 있다. 저만치 진노랑꽃이 소복해 일어나 가봤더니 크로커스 종류였다.
슬리퍼를 끌며 멀리서 봐도 부스스한 얼굴의 도가 다가오고 있다. 앉자마자 안 그래도 먹을게 하나도 없었다며 햇볕에 눈을 찡그려 가며 금방 먹어 치웠다. 허기도 면하고 햇살에 노곤해진 도가 대뜸 한 말은,
엄마, 우리 오늘 알프스 보러 갈까?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뭐라고? 그럼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가야 되잖아!
아니야, 뮌헨이 남쪽이잖아. 기차 타고 한 시간 반만 가면 국경지역에 알프스 산맥이 여기도 있어. 친구들하고 가봤거덩, 추크슈비…
여기까지 듣다가 벌떡 일어나 아이 등짝을 치며 기숙사 쪽으로 등 떠밀었다. 뭐 하냐고, 그럼 빨리 씻고 나와야지!
발음도 어려운 추크슈비체(zugspitze)라는 곳은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알프스 자락 중 하나로 독일에서 제일 높은 산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부랴부랴 달려간 꿈속 현장 뮌헨역에서 이젠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무궁화호 느낌의 완행기차인데도 시간이 얼마 안 걸리는 걸 보면 확실히 뮌헨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정말 알프스 설산을 볼 수 있을까. 기대감만큼 믿어지지 않는 행보였지만 종착역에 내리자 역사 처마 아래로 보이는 풍경들은 제대로 가고 있다는 걸 암시했다. 전나무숲이 받치고 있는 거대한 바위산에 눈이 히긋히긋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서부터 산악기차로 갈아타고 산골마을을 지나 숲으로 들어섰다. 굽이굽이 오르다 중턱쯤 호수가 보이는 첫 번째 정거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갈 것인가, 쭉 기차를 타고 오를 것인가 갈림길이었다. 우린 배가 고팠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생각에 그곳에 정차해 버린 게 작은 실수였다. 운치 있는 산악열차를 시간때문에 다시 탈 수 없었으니까.
배는 불렀지만 케이블카는 공포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데다 그렇게 높은 곳을 올라가니 귀가 막혀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지금까지는 침을 한번 삼키는 게 방법이었다면 여기서는 통하지 않았다. 우리 몸에 뚫려있는 구멍 중 한 곳이라도 막히는 게 이렇게 공포스러운 일일 줄이야. 멀쩡한 도가 가르쳐 준 방법은 콧구멍을 손으로 꼭 막고 힘컷 숨 내쉬기(바다 속에서도 수압 때문에 귀가 아프면 이런 방법을 쓴다는 걸 알았다. 귀뽑기, 라는 말도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네 명밖에 타지 않아 휑했던(그래서 더 무서웠던) 케이블카 안에서 별짓을 다하며 마침내 정상에 도착, 그토록 말로만 들어온 알프스의 실제 모습을 보고 말았다. 사실은 이것 또한 멀리서 본 이미지라 멋지다 같은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은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설산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살짝 허무감까지 들었다는 말도 추가하여. 그리고 이렇게 하늘이 가까운 높은 산 정상에 편하게 올라 알프스를 사방에서 조망할 수 있게 만든 인간의 능력,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높이 나는 새만큼 날아올랐고 무엇보다 안전했다. 몸으로 알프스를 만나지 않은 난, 그래서 그저 그곳을 환상적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