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와 바넷사
기차역 근처에 사니 가끔 역으로 마중 나갈 일이 생겼다. 이곳에 오래 살았다면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찾아오는 지인들이 처음일 가능성이 낮아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 겨우 1년 반정도 살은 곳은 대부분 첫걸음인지라 그냥 데리러 나간다.
자가용이 아닌 기차로 먼 곳에서 방문하는 이들은 주로 내 친구들이다. 이렇게 찾아올 정도라면 누군가는 괘 친한 사인가 보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닌 게 좀 신기할 따름이다. 글로 만나 얼굴은 몰랐던 친구, 오래 살았던 부산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이나 마음을 별로 나누지 않았던 두 사람, 사촌동생 등 딱히 서로 궁금해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기차표를 사고 시간을 주시해야 되는 귀찮음을 감수하며 뚜벅뚜벅 찾아와 주었다.
당신들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에 사는 누군가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옮겨 다니는 삶을 살며, **에 놀러 와! 가 내 인사이기도 했으니. 그 기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먼 곳에 살아 성인 된 모습을 겨우 세 번 본 조카가 결혼하여 이제는 더욱 먼 발틱해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는데, 왜 그렇게 만나러 가고 싶은지… 어쨌든 좋다. 찾아와 주는 건 고마운 일이고, 역사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선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 없던 정이 생기고 연락도 자주 하게 되어 마침내 여행친구로 이어졌다. 어쩌면 궁금한 곳이 있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집을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현재 친구인지 모른다. 전화기 속 친구들과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난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왔고, 떠나오고 보니 또 떠나도 되겠다는 용기가 조금 생긴 상태니까.
지난 일요일에도 하룻밤 묵을 손님을 맞기 위해 역사 안을 서성거렸다. 어느 때보다 긴장되었던 건 외국인이라 그럴 것이다. 스위스 젊은 여성인 마누(manuela)와 그녀의 이탈리아 친구 바넷사가 오기로 했다.
마누는 도의 독일어 첫 선생님이자 지금은 여자 사람 친구다. 5년 전, 독일문화원 괴테 인스티투트에 독일어를 배우러 갔다가 맺어진 인연이 지금도 여전하다. 마누는 도’보다 두 살 위지만 결혼도 하였고, 한국에서 교사생활이 특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베른 근처 다문화학교 교장선생이 될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가득하다, 는 걸.. 만나보지 않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뮌헨의 도를 베른 근교 자기 집으로 불러 먹여주고 재워주고 데리고 다니기까지 하며 주변 산하를 구경시켜 준, 자칭 도의 스위스 누나였기에 들어서 알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살았던 일 년이 k-사랑으로 이어져 기회가 되면 여행을 온다. 도의 힘든 외국생활에 휴식 같았던 마누의 친절을 생각하면 여러 날 묵어도 감사한 일이지만, 젊은이들은 바쁘다. 스위스로 돌아가기 이틀 전 하룻밤 묵으며 김치 담는 걸 배워보고 싶단다. 부담 없는 소박한 방문이라 사실 또 고마웠다.
기차도착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올라오는 에스칼레이트에서 내린 사람들이 두런두런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멀리서부터 인지가 안되었는지 갑자기 서양여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나도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나누고 말았다.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결국 한국어와 영어. 그럼에도 바네사의 외모와 그녀의 이탈리아어는 <시네마 천국>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전달되었다. 우리는 모두 호모사피엔스, 언어와 세대는 달라도 수다를 좋아하고 면면히 흐르고 있는 수렵채집인기질은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거기다 마누는 독일어를 풀어놓은 만큼 한국어를 줍고 있었다. 정말 대화 중에 알게 된 새로운 단어들을 폰에 즉시 메모하고 있었다. 조금 느리게 한국말을 해주는 게 그녀를 도우는 일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왔던 날이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시끌벅적한 노천식당에서 파전, 빈대떡, 막걸리를 먹었다. 너무 좋아하더라. 덩달아 우리 오일장이 유럽 무슨 마켓 못지않은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바넷사는 부모님을 위한 도자기 머그잔을 흥정하며 샀고, 마누는 호떡맛을 아는지 줄서기를 자처했다. 문득 시골 오일장에 파란 눈의 아가씨들이 섞여있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누구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풍경에 눈앞의 글로벌을 실감했다.
집에 들어와 조금 쉬었다 소기의 목적인 김치를 위해 텃밭으로 향했다. 함께 얼갈이배추와 쪽파를 뽑아와 간단하게 절여 겉절이 담는 법을 보여주었다. 마침 김장용 배추와 무가 조금 자라고 있어 김치의 정석인 김장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작년 묵은지랑 여름 고랭지 배추김치맛을 보이며 발효기간에 따른 맛의 변화를 비교해보기도 하고.
모든 음식을 감으로 하는 불량주부에게 정확한 시간과 레시피를 물어올 땐 난감해, 모두는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맛을 찾기 위해 자주 해보면 된다는.. 오히려 의욕을 꺾을 수 있는? 말을 하고 말았지만 사실 모든 음식은 개인적이고 로컬화 될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 먹은 비빔밥 나물은 너무 굵었고 조금 느끼했다. 한국 가정에서 맛본 김치맛이 기준이 되어도 좋지만, 아니야, 너무 짰어, 젓갈을 줄이고 양파를 넣어볼까,라는 생각에 이른다면 머지않아 그녀들은 김치 담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김치에 진심인 마누와 바넷사가 신기할 뿐이다.
다음날은 가까운 산에 자리한 사나사라는 절에 갔다. 유명한 양양 낙산사를 다녀왔다지만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고즈넉한 산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공간에 잠시 빠졌던 대웅전의 고요함이 두 사람에게 마음의 쉼표로 살아나기를. 우리 민간신앙 속 토속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삼성각과 벽화 '십우도' 앞에서 어쩌다 조왕신과 측신 이야기가 나왔다. 막 가을이 도착한 조붓한 산길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은 또 수다를 대신한다. 그림을 그리는 바넷사는 부지런히 야생화들을 찍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질 이곳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며 산을 내려왔다.
꼭 만나야 할 동네 친구들을 소개하듯 냇가 가로수길, 강변길, 자작나무길을 여유롭게 혹은 바삐 걸었다. 인천 가는 버스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놀러 온 조카 배웅하듯 그녀들이 좋아한다는 김밥과 가락국수를 사 먹여서 이번엔 기차역이 아닌 버스터미널에서 배웅을 하였다. 인천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마침 있었고, 오랜만에 현장에서 표를 끊어(예매가 안 되는 읍터미널^^) 손에 쥐어주는 정겨운 장면도 있었다. 인천에서 친구를 만나고 경유지인, 하필 뮌헨 공항으로 다음날 떠날 것이다. 마누와 바넷사의 한국 친구집 방문은 짧고도 길었다.
때론 부모의 마음으로 대부분은 이모(마누가 그렇게 불렀다)의 마음으로 그녀들과 함께 했지만, 셋이 친구가 된 시간은 책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눈 때다. 도가 마누집을 방문할 때 내가 사준 한국 그림책을 선물해서 인지 그녀 역시 그림책을 선물로 가져왔다. 스위스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globis라는 캐릭터책과 세편의 이야기가 담긴 민담 설화(folk tale) 집이다. 알고 보니 '윌리엄 텔 사과'에서 윌리엄텔이 독일이 아닌 중세 스위스의 전설의 영웅, 명사수이자 사냥꾼이었다. 바넷사가 예비 그림책작가인 건 방 책장에 있던 그림책들에 환호하며 함빡 빠지는 걸 보고 알게 되었다. 당연 이탈리아 볼로냐 그림책 축제 이야기가 나왔고 둘 다 흥분하여 각각 글과 그림을 맡아 작품을 완성하여 함께 나가보자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준비하지 않았던 내 선물도 자연스레 정해졌다. 책장에 있는 책 중 마음껏 골라가기! 바넷사는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이 일품인 <산토끼 가족의 이사>를 골랐고, 마누는 미하일 엔데 작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을 골랐으나.. 가고 나서 보니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다. 어릴 때 재밌게 읽은 책이 한국말로 되어있는 게 무척 신기하다고 해서 한국어 공부하기 좋을 것 같아 가져가라 한 건데 너무 오지랖이었나?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니 여행을 오면 꼭 자기 집에 묵어야 된다는 기특하고 인정스런 마누.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출근한다는데 삼십 분 정도 달린다는 그 오솔길 가을 풍경은 어떨지. 그림을 배우며 동물애호가인 아버지와 스무 마리의 고양이를 돌본다는 바넷사의 매우 오래되었다는 집은 또 어떻고.
이방인들을 만났는데 우리네 옛정서가 떠오른다.
동쪽 창문으로 기차역이 보인다. 까만 밤에도 역명에 들어온 불빛은 환하다. 재택을 자주 하는 운은 기차소리가 일에 방해된다며 불평을 하던데, 난 이상하게 기차소리가 거슬리지 않다. 소음에 무딘 사람이 결코 아님에도 기차소리는 왠지 정겹기까지 하여 증기기관차 비슷한 '뿌뿌!'소리가 나지막이 들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들과 본 <토마스와 친구들>이 생각나서다. 혼자 있을 때 '철커덕철커덕! 소리는 위로가 된다. 화물차의 '쌩!' 소리는 신경에 좀 거슬리지만 용서가 된다. 여러 종류의 기차가 서울로 강원도로 남쪽 지방으로 부지런히 오고 간다. 집과 근방에 집착하고 안주하는 개인주의자가 그나마 바깥 세상으로 향하는 첫 출발지인 읍의 작은 기차역, 돌아올 여기가 있어 두려워도 또 어디론가 떠나보며, 잠시 머물다 갈 손님들이기에 기꺼이 마중하러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