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많은 언니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언니는 벌써 중학생이었고, 중학생 때는 무려 대학생이었지요. 서울로 유학 간 언니가 방학이라고 집에 오는 날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버스를 오래 타고 언니가 집에 도착해 함께 먹는 첫끼는 대부분 저녁이었는데, 그 저녁밥이 왜 그렇게 맛이 없던지요. 설레고 흥분하면 그렇잖아요.
대학생 언니랑 꼬맹이 동생이 보냈던 여름방학 추억에는 이런 장면이 있네요. 텃밭 오이를 강판에 갈아 과산화수소수랑 섞어 얼굴에 서로 붙여주고, 밤이면 장마로 맑아진 냇가에서 이야기 속 선녀들이 하던 비밀 목욕 같은 걸 했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달과 별만이 지켜봐 주는 곳에서요. 시원하고 얼굴이 하얀 여름이 되었는지는 가물가물 합니다.
젊고 어렸던 자매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시기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젠 방학이 없어져 그나마 함께 하던 시간도 없어졌겠죠. 아이들 방학 때는 더 바쁘니까요. 아, 결혼 전에 잠깐 언니집에 얹혀산 적 있는데, 언니가 직장과 육아로 그렇게 힘들어도 집안일 하나 제대로 도와주지 않은, 철딱서니 없는 동생이었습니다.
사느라 바빠서, 정말 바빴는지, 삼십 대부터 우리가 함께한 추억은 별로 없네요. 사는 지역이 달라서이기도 하고.. 우린 너무 다른 성향의 자매로 어른이 되었거든요. 언니가 개미라면 저는 베짱이 같은 기질이 여러모로 결혼 후의 삶을 달라지게 하더라고요. 육아를 함께하던 동네언니들이랑 더 정다운 사이가 되는 동안 우리 언니를 잊은 듯 살았습니다. 가끔 가족모임에서 만난 언니 얼굴에는 늘 긴장감이 서려있고 한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 부지런을 떨던 모습이 선하네요. 어릴 때부터 주변 챙기는 데는 선수였으니까요.
20년 세월 동안 서로가 얼마나 모르고 살았는지… 중년이 되어 언니 가까이 삶의 터전을 옮기고 보니 색다른 이야기가 서멀서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영화 <8월의 고래>에는 늙은 자매가 나옵니다. 미국 메인주 대서양 바닷가 마을에 사는 이들에게 가을의 전령 고래를 보는 일은 축제처럼 흥분되는 일입니다. 흑백의 첫 장면에서 젊은 자매는 망원경을 들고 고래를 보며 흥분하여 호들갑을 떨지요. 곧 흑백 화면이 컬러로 변하더니 대부분 그대로인 그곳에 노인이 된 자매가 쓱 나타납니다. 우리 모습 같아 선뜩하더라고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우리도 요즘 갑자기 나이 든 자매가 되어 같은 공간에 툭 놓인 느낌이거든요.
언니 리비는 소소한 일상을 반짝반짝 닦는 사람입니다. 이웃들과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하며 마당 장미를 꺽어집안을 장식하고 죽은 남편 사진을 앞에 놓고 대화를 하는 사람이지요. 동생 사라는 처음부터 그랬는지 병으로 시력을 잃어 그런 건지 냉소적이고 만사가 부정적입니다. 늙어 함께 사는 언니가 잘 돌보려 애쓰나 사소한 일에서 점점 부딪히게 되어요. 사라가 죽음을 들먹이며 악몽을 꾼 날 두 사람의 다름이 절정을 이루지만 또 자매는 다음날 서로를 챙기며 산책을 나갑니다. 영화는 1박 2일 동안 자매의 그저 그런 일상일 뿐입니다.
요즘 우리 자매는 이런 대화를 합니다.
#장면 1
어느 토요일 오후, 발신자가 '언니'인 전화가 서너 번 울리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어요. 또 터치가 잘못되었을 거라 짐작하여 그냥 있는데, 다시 와서는 이러더라고요.
- 나 다른 곳에 있어, 내일 집에 안 와도 돼.
- 어, 그래..
- 내일 오면 안 돼에!
- 어.. 내일은 일요일인데.. 화요일 가는 날인데..
-.... 아, 맞다..
#장면 2
언니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턱을 다친 다음날 가봤습니다.
- 있잖아, 혼자 있으면 무서워. 저기 저 스카프 있지. 저 스카프가 막 움직여 나를 공격해 오는 거야. 무서워 달아나다가 다쳤잖아.
- 뭐!! 집에 식구들 없었어?
-.....
#장면 3
언니는 편마비까지 와서 일상생활이 많이 불편합니다.
- 옷 입는 게 너무 힘들어..
- 아줌마나 요양보호사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 나가고 싶은데.. 그래서 옷 들고 바깥으로 나가. 1층 젊은 사람한테도 입혀달라 했고 지나가는 사람한테도 부탁해.
- 뭐라고..
- 있잖아, 사람들은 다 친절하더라.
- 언니야 그러다 큰일 나.. 대부분 다 친절하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요즘 얼마나 이상한 일이 많은 세상인데.. 제발 그러지 마.. 기다려야지..
- 알써, 알써.(이 이야기를 볼 때마다 합니다)
#장면 4
따뜻한 겨울 오후, 언니랑 산책을 나섰습니다. 대뜸,
- **이는 부잣집에 장가보내.
- 뭐???
-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이제 편하게 살아야지.
- 무슨 고생을 했다고... 그리고 부잣집 딸이 우리랑 어울리기나 해?
- 통계에도 나왔대, 부잣집 애들이 인성도 좋다고..
-몰라, 둘이 마음 맞으면 그만이지..(마음속에서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언니야, 저것 봐! 오늘 하늘이 진짜 파랗네! 함께 산책하니 좋다!
조카를 위한, 어쩌면 동생은 위한 말에 동생은 살짝 기분이 상했습니다. 힘들고 흔들릴 때마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한 삶이라고 참되려 노력했는데, 고생이라니요. 언니가 말한 고생의 의미는, 그동안의 삶이 보잘것없어 할 수만 있다면 갈아타는 게 상책일 것 같습니다. 장학금으로 학교 다니고 알아서 나아가는 조카가 언니에게는 고생스러워 보였나 봐요. 말로는 대견하다 했지만, 모든 걸 돈으로 자식 인생을 대신 살아온, 그런데 무지 외롭고 불안한 자기 삶을 긍정하기 위해... 아, 지금은 긍정이고 뭐고 그만 언니의 본색이 나와버린 겁니다. 안 그런 척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언니의 유약한 자아에 어떤 쓰나미가 불어 닥친 것일까요. 그리고 얼마만큼 잃어버린 걸까요.
재활을 갔다 온 날 새 모이만큼 점심을 먹었는데도 소파에 쓰러져 자더라고요. 깨우기 뭐해 조용히 챙겨 집을 나오는데, 백 미터도 가기 전에 지갑을 들고 머리는 부스스 신발은 짝짝이인 언니가 애타게 동생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더라고요. 차비 준다고, 차비 가져가라고.. 아, 우리 언니에게 동생은 늘 보살펴야 되는 존재, 그리고 돈이 없어 울고 있습니다. 자아가 다하는 날까지 우리 언니는 나만 보면 돈을 쥐어 줄 것이며, 아니면 어느 날 종이쪼가리처럼 돈을 온데 흩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언니가 준 차비를 갖고 나는 서점엘 갑니다. 부자 동네에 사는 언니집 근처에는 대형중고서점이 있거든요. 보고 싶었던 책을 잔뜩 사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꺼내보다가 책 속에 빠져버리지요. 언니일일랑 까맣게 잊어버리고요. 영화에서 언니 리비가 동생 때문에 힘든 날, 저녁에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죽은 남편 사진을 벗 삼아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는 것처럼요.
올 한 해 다른 별일은 없었네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일도 크게 속상한 일도 드물지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집어내 글을 쓰는 일은 판타지 세계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러고 돌아오면 자전거 체인에 기름칠한 것처럼 사는 일이 조금 매끄럽게 굴러가지요.
아버지의 죽음은 순리였고, 늙은 엄마를 두고 먼저 간 큰오빠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언니의 병은 참 슬프네요. 눈앞에서 서서히 늪속으로 빠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함께 빠지고 있는 듯한 두려움까지 언니를 만난 날은 온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우린 목소리도 걷는 모습도 점점 닮아가고 있는데, 언니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내가 있는데, 어떻게 만나야 될지..
언니 이야기가 넘치고 넘쳤지만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가 나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언니를 불행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씀으로 언니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요. 이제는 동생 같은 언니를 돌보려고요. 가난한 동생이 기꺼이 되어야겠습니다. 가난한 동생이 언니한테 영원하기를 바라봅니다.
*커버 이미지, 그림책 <우리 언니>/샬로트 졸로토 글. 마사 알렉산더 그림/ 언어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