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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l 29. 2023

약속의 속내


장맛비가 쉼 없이 내리던 일요일 오전이었다. 오래된 친구 정아한테서 카톡이 한 줄 오더니 곧 전화까지 왔다. 안부를 묻는가 싶더니 조금 망설이다 양평 가까이 볼일이 있어 올라오고 있는 중이라 했다. 일 보고 시간 되면 우리 집 근처에서 잠깐 얼굴 보자고. 반가웠지만 비가 쏟아지는 휴일날 이렇게 급히 올라올 일이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그간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뜻밖이었다.



정아는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진 않았어도 죽마고우에 가까운 친구다. 초, 중, 고,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유일무이한 친구이기도 하다. 공간과 시간이 겹치는 세월이 많은 만큼 추억이라는 활동사진 속에 정아는 곧잘 등장한다. 첫 번째 기억은, 국민학교시절 오후 수업이 있는데도 도시락을 안 가져간 날 선생님은 정아집에 가 점심을 먹으라고 짝을 지워주었다. 면소재지에 사는 애들은 가끔 집이 먼 친구들을 위해 이런 점심 봉사를 해야 했다. 모두가 순수했던 시절 배고픈 애들이 없도록 하려는 선생님의 배려이자 묘책이었다. 중학교 정문 맞은편 한문선생님댁이 대가족이 살았던 정아네 집이었다. 그때는 잘 알지 못했던 친구를 따라가 보리밥을 얻어먹었다. 다음 장면은… 정아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그 집 앞을 지나다 물끄러미 대문을 쳐다보았던 기억. 계절은 자주 바뀌어 햇살이 가득했던 겨울 운동장에도 정아가 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인지 입가엔 밥때가 손에는 강정을 하나 들고서 왁자지껄했던 꼬마야 꼬마야 줄넘기 속으로 훌쩍 뛰어들었다가 이내 나온다. 화단에서 찍은 국민학교 졸업 사진 속 우리 둘은 심각과 무표정 사이 얼굴을 하고 나란히 붙어있다.


소녀가 되고 숙녀가 되고 젊은 여성이 된 우리들은 결혼이 선택이 아닌 통과의례로 인식하며 젊은 엄마까지 당연히 받아들였다. 써클(동아리) 선배의 페스티벌 파트너로 정아를 소개해 줬다가 둘이 결혼까지 해버린 사건은 정아의 인생에 내가 살짝 끼어들어버린 의도치 않은 일이지만, 어쩌겠나.

사는 곳이 멀어졌지만 전화통을 붙들고 육아와 생활의 고충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벌리던 출구 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끊어져버린다. 다시 관계를 이을 조금의 여유도 없었던 어두운 터널의 시간, 우리는 허급지급 어둠을 걷고 있었다. 터널은 끝이 있게 마련이고 고향친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물 같은 고향 공동체에 우린 엮여 있었으니까.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건 중년의 문턱에서다.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았던 긴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베프라는 사실에 의심이 없어 무엇이든 얘기할 수 있었지만, 우린 이제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말로 쏟아낸다고 가슴이 뚫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흩어진 단어들이 남기고 가는 공허감을 알기에.

그럼에도 사춘기를 건너며 우정이 돈독해진 것처럼 갱년기는 다시 우리를 묶는다. 수다대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바람이 억세게 부는 바닷길도 좋고 반짝이는 강변길은 더 좋지. 들길을 걸어 나와 낯선 동네를 도란도란 걸으면 끝없는 이야기는 어디로 갈까.

어디라도 함께 걸으며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늘 맴돌고 있다. 생활이라는 쳇바퀴를. 계절이나 해가 바뀔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던 약속의 말들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적한 카페에서 정아의 남편이자 내 써클 선배, 그리고 우리 부부 넷이서 만났다. 가평에 있는 거래처의 긴급한 일을 봐주고 이리로 온 것이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일요일 오후가 갑자기 활기차졌다. 늘 왕래가 있던 이웃을 만난 것처럼 스스름없이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랜 친구는 나의 젊은 시절을 어제 일처럼 술술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강의시간에 몰래 침입해 소개팅 장소를 말하고 갔다는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다. 하늘 같은 선배에게 페스티벌 파트너를 당장 소개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 똥줄이 빠졌을지도. 급하게 알려줘야 할 일이 있으면 찾아가는 수밖에 없던 시절의 장면인데, 결국 정아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제안으로 멜빵바지를 입고 페스티벌 장소로 갔고 운명은 그들을 엮어버렸다. 더 웃겼던 건 그전에 정아한테 선배에 대한 정보를 내가 마구마구 흘렸다는 것이다. 괜찮은 선배가 있다. 방학 지나고 오니 살이 빠져서 더 잘 생겨졌더라 등. 이건 완전 뚜쟁이 아닌가!

살 빠져 잘생겨져 온 선배에게는 알고보니 웃픈 사연이 있었는데, 방학 동안 꽃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돕다가 제값을 못 받는 현실에 분개하여 직접 꽃을 팔러 나갔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꽃을 팔아볼 거라 동동거렸을 모습을 생각하니 무채색으로 훅 지나가는 독립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이 한편이 서늘해졌다. 듣고 말하는 우리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알기도 모르기도 했던 깨알 같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리는 그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히긋히긋 얼굴은 커졌다. 약속을 하고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그렇게 쉽지 않더니 또 이렇게 쉽게 만나 단박에 회포를 풀었다. 왜 그렇게 약속은 힘이 없었던 것일까. 정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렴풋이 해답 비슷한 게 떠올랐다. 우리에겐 이제 간절함이 없다. 남의 강의실에 뛰어들 만큼 간절하게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거 말이다. 젊은 시절엔 소소한 일상에도 절체절명의 무언가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열정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이놈의 나이. 약속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된다. 친구나 이웃이 필요하나 아무도 없는 곳에 꽁꽁 숨고 싶다. 여행을 원했으나 여행은 불편하다. 이런 이중적인 마음들이 언제부턴가 나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올라하는 열정은 어린 나의 고까짓 열정쯤은 비할바가 아닐 정도로 폭발적이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 인생의 특이한 지점을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너도 알듯이, 젊었을 땐 자거나 아니면 깨어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만, 나이가 들면 세번째가 있단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그런 밤들이 있어. 아주 독특한 상태야. 늙는다는 것의 비밀 중 하나는 그런 상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거야. - 단편집 <여름 거짓말> 중 '남국 여행' p355 -


장마와 폭염을 핑계로 지키지 않는 약속들을 위한 변명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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