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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an 24. 2024

온기가 필요한 마음들에게

필사 릴레이

한정원 <<시와 산책>> 중, <국경을 넘는 일>에서




          이제 내 마음이 말을 그친다

          파도도 그치고

          독수리들이 다시 날아간다

          발톱이 피로 물든 채 *


말을 잃은 적이 있다. 목소리를 갖고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내게서 말을 훔쳐간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아올 힘이 내겐 없었다.

그때 나는 마르셀 마르소를 만났다.

무언극 배우인 마르소는 60년간 비(非)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얼굴을 하얗게 분칠하고 붉은 꽃이 달린 모자를 쓴 '빕bip'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였다. 그의 팬터마임은 짧지만 깊은 감정을 압축하고 있어서, 몸으로 시를 쓴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태생 유대인인 마르소는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발각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한편, 연기와 팬터마임에 대한 일관된 사랑을 키워갔다.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서 고아원에 있던 유대인 어린이들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무사히 넘어가도록 돕기도 했다. 아이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보이스카우트 리더 흉내를 내며, 마치 모두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느끼게 한 것이다.

긴 시차와 공간의 폭을 두고 살아가는 나도 마르소에게 기댈 수 있었다. 그가 지어내는 몸짓을 따라가다보면, 말을 않고 지내는 시간도 덜 무서워졌다. 나의 슬픔도 모험 같은 것이라 느끼며, 하여튼 계속 걸었다.


내가 오래 기억하는 하루가 있다. 그즈음 마임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날도 지하 연습실에 있다가 휴식을 취하러 건물 입구로 올라갔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 말을 돌려받지 못한 때였다.

맞은편 야트막한 담 아래, 누가 한 소쿠리만 쏟아놓은 것처럼 둥그런 볕이 보였다. 이상할 것도 없는 장면이었는데 왠지 눈에 설었다. 볕이란 것을 처음 보는 듯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기로 건너갈 수도 있지 않을까.'

열 걸음도 걷지 않아 맞은편에 도착했다. 세 뼘 정도의 볕 안으로 들어가 앉았더니, 내 몸과 크기가 딱 맞았다. 목덜미와 등으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잠시 후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지하로 내려가기 전 볕을 또 한 번 멀리서 바라보았다.

어떤 일을 겪고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살 수는 없어, 그건 거짓된 삶이야, 하지만 이제 볕이 보이네,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중얼거릴 뻔했다.

다시 이전과 같이 나의 미래를 낙관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사랑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도 끝과 죽음을 먼저 고려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깨달았다. 내가 국경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하나의 모험이 끝나가고 있어서, 나는 선 채로 아이처럼 울먹거렸다.



묵호의 햇볕을 쬐고 온 후 마침 이 글귀를 발견했다. 스프링버드 님의 필사 글을 통해 다시 꺼내보게 된 책 <시와 산책>에서다. 지난겨울을 살게 했던 책인데, 이번 겨울 다시 보며 마음들에게 다가가 보았다.


*올라브 하우게, <이제 내 마음이 말을 그친다>/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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