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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Mar 28. 2024

흔들거리는 봄날


어디라도 나가야 될 것 같았다.

시골 갔다 온 이후로 왼쪽팔에 통증이 다시 살아나 컨디션이 안 좋은데, 강변마을 쑥이 아련거려, 날씨까지 좋은 날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겨우 전철 두 정거장에 내려 타박타박 걸었다.

동네 어귀에 조성된 공원 다리에 서서 물끄러미 작은 물살에 흔들리는 물풀을 바라보았다. 물풀만 보면 영드 <제인에어>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다시 만나 결혼하고 가정까지 이루는 제인과 로체스트가 풀밭에서 키스하며 스러지는 그때, 카메라는 슬그머니 주변 작은 개울을 비춘다. 익은 봄날의 개울은 물풀이 말없이 무성하여 세찬 물살에 용트림하듯 휘날리고 있다. 더없이 힘차고 싱그러운 물풀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물풀들은 매끄럽게 꼬리 치듯 물살에 흔들린다.



목적지인 삼색버드나무 밑의 쑥이 아니라 공원에 펼쳐진 쑥 군락지에 주저앉고 말았다. 생각 없이 쑥을 캐기 시작했으나 차마고도 소금밭을 일구는 여인의 무심함, 콩타작을 하는 노구의 끊임없는 손놀림을 생각하게 되자 곧 온몸이 뻐근해져 일어나고 만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겨우 국 한 그릇이나 될까, 싶은 소득에 조금 몸서리 쳐진다.



지난주 시골 갔다가 92살 엄마가 안겨준 쑥 꾸러미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꼬부라진 허리로 앉아 얼마나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야 그만큼 캘 수 있을까. 무심? 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마음이 맞겠다. 쓸 마음이 거의 소진되자 더욱 두드러지는 엄마가 아닌 어미의 본능.

때가 되어 죽고 쇠약해져 가는 자식들인데도, 엄마는 새끼 잃은 어미, 다시 새끼를 돌보아야 되는 어미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노구를 이끌고 들판을 다니며 약초를 모은다. 뿌리를 캐고, 꽃과 잎을 말리고, 나물거리를 캔다. 집에 온 자식 편으로 바리바리 싼 꾸러미를 안기며 이집저집 나눠 주기를 부탁한다. 엄마의 머릿속 지도에는 집을 떠난 자식들이 모두 가까운 곳에서 오글오글 살고 있다.

이번에 내가 숙제로 받아온 건 파김치와 쑥 꾸러미다. 미각을 거의 잃은 엄마가 담은 파김치는 매우 강렬하다. 맵고 짜고 달다. 아픈 언니를 위해 홍합을 넣어 쑥국을 끓이고 파김치랑 갖다주라 했다.

겨우 3박 4일 머물고 떠나오며 난 미안한 마음을 잔뜩 가지는 바람에 꼭 그러겠다고 안심시키며 엄마를 다독여 주고 왔다.



아직도 응석받이 막내 기질이 있는 자기중심적인 딸일 뿐인데,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하는 나를 물그러미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말았다.

그날밤 내 집, 내방이 그리워 거의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50여 년 전 어느 밤에 몰려왔던 낭패감과 닮아 더욱 기이한 감정에 휩싸였다. 깊은 산중 마을에 있는 고모집에 사촌언니를 따라간 날 밤에 집이 떠나가도록 울었던 날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엄마를 떠난 잠자리는 저 광활한 우주 별밭에 툭 떨어진 듯 무섭고 외로웠다. 며칠 기약하고 따라나섰지만 결국 하룻만에 다음날 오일장에서 어린 나는 엄마에게 건네졌다. 그런데 수십 년이 흘러 엄마 옆에 자는데, 그리고 늙기까지 하는 어른인데, 꼭 그때의 유아적 감정이 살아나 잠자리가 외롭고 힘들었다. 어이없게도 아늑하고 조용한 내 방과 말을 잘 들어주는 상대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말이다. 도대체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겨우 며칠밤이 무어라고 난 어린아이처럼 상황을 투정하고 있었다. 관계는 미각보다 청각이 더 문제였다. 밤낮으로 집안을 점령하는 큰 tv소리와 원활하지 못한 대화는 우리 사이의 정서를 방해했다. 오직 새끼로만 있어야 되는 시간들이 미칠 지경인것이, 그만큼 엄마한테 미안했다.



집에 사람 드나드는 것이 불편하다고 요양보호사를 거부하고, 올해는 마지막으로 콩을 꼭 심어 메주를 다시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주간보호센터마저 또 미루는 초고령 노인의 적적한 일상에 이벤트가 되고자 갔다가 자라지 않은 내 마음만 발견하고 왔다. 어미가 된 엄마에게 새끼인척 할 수 있는 마음이 둥지를 떠나 다시 돌아온 새끼의 성장일 것인데, 난 그러지 못하는 여전히 새끼일 뿐이다. 자유는 이름뿐인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둥지를 맴도는.

어느 것도 독립되지 못한 남편을 만나 살며 그들의 부모자식 관계를 얼마나 비난했던가. 큰 나무 아래 보호받고 있는 말쑥한 어린 나무 같은 모습에 반했으면서. 어항 속 금붕어, 온실 속 화초의 고요함을 좋아했잖아. 사실은 어항 속으로 온실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나? 결론은 비난했던 그와 내가 알고보니 매우 닮은 성정이었다. 다른 말로 우리는 거의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부모의 자식들.. 나는 폴폴 날아 둥지만 바꾸었던 것이다. 좋을 줄만 알았던 둥지도 떠나온 둥지도 이젠 불편하고 애처롭다. 빈둥지 증후군을 앓아야 할 시기에 지금 나는 옛 둥지 타령을 하고 있다. 둥지의 목표는 비우고, 떠나는 장소일 뿐인데.



시댁, 친정을 둘러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낫은 왼팔 통증이 다시 올라왔고 이번에는 가렵기까지 하더니 이윽고 발진이 올라왔다. 보이지 않는 신경성 통증이 겉으로 벌겋게 표시까지 내는 이것은.. 말로만 들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온다는 그 증상이다. 병원을 가라고 주변은 호들갑이지만 붉은 반점들이 내 마음 같아 그냥 바라보고 있다. 아는 마음이니까, 알고 있으니 조용히 물러가라고 이렇게 글을 쓰며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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