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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pr 06. 2020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소설 <번외>를 읽고

작가 박지리는 6년 동안 6편의 소설을 남겨놓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저희는 우울증을 포함해 불치병에 걸리지도, 궁핍하지도, 애정이 결여되지 않았음에도 지속적으로 자살을 생각하면서 자살을 삶에 있어서 하나의 '시도'로 바라본 끝에 목숨을 끊는 경우만을 진정한 자살이라고 보고, 그것에 '철학가의 자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이 결단력 있는 소수의 철학가들은 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는 스스로 죽음을 찾아가는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답이 있다는 것을.(p 45)


동의하십니까?

오직 삶을 더 자세히 해부해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의 죽음을 핀셋 삼아 삶을 헤집어 보는 고차원적인 자살이라고까지 합니다. 박지리 작가는 이런 자살을 한 것일까요? 또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자살들은 그럼 어떻게 되나요? 죽음까지 선택? 할 수 있는 작가는 마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수 클리볼드/반비> 총기난사 사건을 경험한 듯 깊숙이 들어가 우리들을 더 혼란에 빠뜨립니다.


어느 봄날,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 소풍을 가지 못한 고등학생 19명이 지하 시청각실에 모여 영화를 봅니다.

그리고 잠깐 쉬는 시간, 17명의 학생과 한 명의 선생님은 느닷없이 총기난사를 당합니다. 마침 화자인 '나'는 K라는 아이를 찾으러 가는 바람에 죽음은 면했지만 그 상황을 맞닥드린 유일한 목격자이자 생존자가 됩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를 빠져나가는 K의 모습을 막 보고 온 직후에 말이죠...


K는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시민권자로 엄마는 의사, 아버지는 법학교수, 남부러울 거 없는 교양과 지성이 풍기는 집안인 듯한데, 어쩐 일인지 고흐처럼 늘 한쪽 귀가 붕대로 감겨 있습니다. 귀는 일종의 손잡이 같은 거라 잡기 편한 곳이라 말하면서 말이죠.


유일한 생존자인 나는 살아남아 삶이 비루해지고 힘듭니다. 모두 자기식대로 말하고 위로하는 사람들.

병약했고 가족과 학교를 겉돌다 K를 만나 그나마 영화 얘기로 외톨이를 살짝 벗어날 때쯤이었는데...

공범자인가, 피해자인가 집요하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주변에 딴지가 걸어집니다.

마지막 장면까지 정말로 보기 드문, 상상을 무지 자극하는 열린 결말로 끝까지 독자를 혼란스럽게 서늘하게 만들고 끝이 납니다.


현실의 우리는 사건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 애쓰고, 방지책을 세우고, 무엇보다 분노하며 사건을 일으킨 죄인을 단죄합니다. 수 클리 볼드 같은 가해자의 엄마가 나서는 특별한 경우도 있고요.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문학은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살아 있다는 건,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은 혼자의 힘이 아니니까요. 마치 조커의 탄생처럼 말이죠.


세월호 생존자들의 고통이 다가왔고  콜롬바인 총기사건과 놀랍게도 닮아 있더라구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의 얘기가 되어 버렸네요.

죄나 자살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고 작가의 삶과 세상에 던져두고 간 그녀의 작품세계가 놀라워

공유해 봅니다.


*번외 / 박지리 /사계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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