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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n 28. 2020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그들만의 리그, 그래도 삶이다!

 


 영화 <버닝>에서 소개받은 작가, 미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인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이다. 퓰리처상,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실험적인 언어 사용으로 미국의 제임스 조이스라 불리기도 한다지만... 이런 무게감(오히려 독서의욕에 더 장애가 됨) 보다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세계랑 닿아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다. 팬은 아니지만 이창동 감독 영화들이 주는 여운과 모호함은  착 감기는 맛이 없는데도 자꾸 손이 가는 음식처럼 호기심을 일으킨다.


 정말 두 세계가 닿아있기라도 하듯 어렵고 모호했다. 더군다나 각 장마다 시점이 달라 처음엔 굉장히 헷갈려 몇 번 되돌아가 보니 '나'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 발견! 낯설고 독특한 서술방식이 주는 산만함이 중반쯤 넘어가면 윤곽이 잡히고 몰입이 된다. 이말 저말 다 들어보니 인물들이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고 진실에 가까이  느낌이랄까.  


 이야기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한여름에 죽은 엄마의 유언에 따라 40마일이나 되는 고인의 고향에 묻으러 가는 온 가족(4남 1녀, 남편)의 어이없는 여정이다. 마차를 이용해 똑바로 가면 반나절이면 갈 길을 온 가족이 걸어가니 홍수도 만나고 화재도 겪고,... 열흘이나 걸린다. 한 여름 염도 제대로 하지 않은 시체는 어떻게 될지... 상상에 맡긴다. 가는 여정에 드러나는 가족사, 이웃들의 이야기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낳은 이 부부는 분명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가 아니다. 남편 앤스는 사랑이 아닌 사람이 필요했고 아내 애디는 인생의 절망을 확인하러 결혼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원하지 않았던 둘째 아이를 낳은 애디는 내면을 장악했던 '삶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친정아버지 말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죽으면 고향땅 제프슨에 묻어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남편 앤스가 하는 소리 좀 들어보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아직 아이들이 둘밖에 없는데, 자식들도 다 낳지 않고 무슨 소리요."

이미 아내에게 남편은 죽은 존재였다.


 그럼 남편 앤스는 이 정도 존재로 밖에 취급 안 하는 아내의 유언을 왜 그렇게 목숨처럼 지킨답시고 무모한 장례 여행을 감행한단 말인가. 왠지 마지막 의무를 다하고 깨끗이 부부간의 거래를 끝내려는 속셈인가. 왜냐하면 고난의 여정 끝에 아내가 원하던 장지에 묻어주고 바로 새장가를 드니 말이다. 아주 가뿐하게!

그럼 자식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장례 여행에 동참하는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를 사랑하는 자식들 말이다.

그들만의 리그라고나 할까. 그 가족은 그냥 그 상황에서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그냥 그랬다.


 가족들, 이웃 모두 여러 번 화자로 등장하는데 엄마인 애디와 외도 상대 휘트필드 목사는 딱 한번 나온다. 그 한 번이 강렬해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비밀과 모호했던 이야기 윤곽이 드러난다. 마치 제목처럼 엄마가 관에 누워서 가족들을 다 보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셋째 아들 주얼을 태어나게 한 휘트필드 목사의 이야기는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하느님 목소리를 빌미 삼아 앤스와 그 가족들에게 죄를 용서 구하기 위해 애디의 집으로 향한다.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미 자기는 용서를 받았다고 좋을 대로 생각한다.

주님은 속죄하려는 내 마음을 이미 받아들이셨다. 앤스가 그곳에 없었지만 내가 용서를 구한 사람이 앤스였다는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셨다. 그녀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는 그녀의 입술이 우리의 죄악을 발설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무한한 지혜를 지닌, 바로 하느님이었다. (......) 나의 죄악은 용서된 것이다.


 가엾은 애디.... 왜 주변 남자들이 모두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용서하고 용서되었단 말인가.

영화 <밀양>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겨우 용서하러 갔는데, 이미 범인은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남부 태생이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상상해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목화밭과 일하고 있는 노예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광막함과 막막함이 떠오른다. 소설 속 이 가족의 이미지도 그러하다. 식구들 모두 전두엽이 헐거운 듯 자기 세계만 있고 도무지 정감 있는 소통이라곤 없다. 오히려 이 가족을 걱정해 주는 주변 이웃들이 더 인정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이 오로지 제퍼슨에 엄마를 묻어야 된다는 한 가지 목표가 있어 각자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기어이 점점 냄새나기 시작하는 엄마의 관을 목적지에 운구하고 만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여정이었는지 알 수도 없고 굳이 판단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의사 피바디 선생이 말한 것처럼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떠나는 엄마를 원하는 곳에 묻어줬을 뿐이다.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이라는 포크너의 문학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도 오히려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우리는 이미 실존적 삶을 살기보다는 정치적 삶에 너무 익숙해 그럴지도 모르겠다. 발가벗겨진 인간의 모습에서 더 연민이 느껴지고 예의가 갖추고 싶어 지니.


 장례식 다음 날, 갈취한 딸의 돈으로 의치를 해 넣고 말쑥한 차람으로 나타난 아버지 곁엔 소형 축음기를 든 새엄마가 서 있다. 엄마의 관을 정성껏 만들었던 첫째 캐시는 추운 겨울날 집안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마음이 따뜻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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