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를 다시 읽으며
여행자들은 동남쪽 바다에 접한 이 큰 항구도시를 이렇게 기억할지 모른다.
코발트색 바다를 굽어보는 마천루 빌딩과 아파트들, 그 사이를 유영하는 요트의 여유, 노을빛 바닷길을 달리는 사람들에게서 전해지는 숨소리, 축축한 어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사투리의 소란스러움과 언덕배기 동네에서 내려다본 항구의 한가로움 같은.
좀 더 잘 말하고 싶지만, 25년을 살았어도 근사한 이 도시에서 대부분 생활인으로 머물렀던 난 여행자의 눈을 이 정도밖에 말할 수 없다. 이것도 직접 본 것인지 소셜미디어 이미지를 떠올린 건지 조금 헷갈리기도 하다. 근사하다는 수식어도 떠나오고 나서야 붙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스스로 우러나서라기 보다는 외지인들 반응에 편승하여 가끔 내려갈 때 살았던 동네나 가보지 않았던 곳을 거닐어보며 인정? 하게 되었다.
알던 장소도 천천히 걸어보면 전에 없던 마음이 생기더라. 어느 시인은 이사 간 동네에 도무지 정이 붙지 않아 골목을 걸으며 그곳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서두르지 않는 귀갓길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살았던 곳을 외지인이 되어 다시 걸은 후에야 그곳에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다른 마음이 당황스러운 시기도 있었으나 또 걸으며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겨울날 부산역에 내렸을 때 맞는 바람이 훈풍으로 다가온 건 추운 지방에서 온 사람의 상대적인 체감이겠지만.
세련되고도 질펀한 이 도시의 내륙은 전철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그냥 도시일 뿐이다. 단, 읍생활자에겐 이젠 번잡한 대도시로 다가온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떠났기에 보이는 것들.
몇 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주로 내가 살았던 곳은 1호선 전철 노선을 기준으로 동쪽에 가까웠다. 갯내와는 거리가 먼, 산과 온천이 있는 이곳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옛날 동래 지역에 다리가 몹시 불편한 가난이 노파가 살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풀죽이라도 끓여 먹을까 싶어 들판에 허영허영 나갔다가 다리를 저는 백학 한 마리를 발견한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쳐다보게 되었는데, 매번 절뚝거리며 특정 장소에 앉아있곤 했다. 어느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다리로 훨 날아오르는 학을 보고 노파는 기이한 마음이 들어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김이 올라오는 작은 물웅덩이가 있더란다. 따뜻하고 미끈거려 약물이라 생각한 노파도 아픈 다리를 매일 그곳에 담갔다는데, 과연 고질병인 관절염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온천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왼편으로 멀지 않은 십자산 근방에는 분화구까지는 아니라도 쑥 꺼지는 낮은 지대의 동네가 있다. 옛부터 여기는 늪지대였고 주변은 소나무가 무성한 작은 야산이 있어 황새들의 서식지로 알맞았다.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늪지대에 내려와 작은 생명들을 잡아먹은 황새들은 알을 순풍순풍 잘 낳았을 것이고, 하여 학란(황새알 또는 한새벌)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우물터 이름도 황새알우물, 이 우물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샘물이 솟아 흐르고 있으니.
여기 황새알우물터 바로 건너편, 동네 중앙에는 10년도 훨씬 전부터 어린이 책방이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치 우물터의 일이 옮겨진 듯 도시화로 삭막했던 이곳에 책방이 있어 마당이 있어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 마치 미하일엔데의 소설 속 모모가 살았던 원형극장의 모습처럼 아이들은 이야기할머니한테 이야기를 듣고 마당에서 혼자 놀기도 친구랑 놀이를 만들어 놀기도 했다. 놀 줄 모르는 도시의 아이들일지라도 흙과 나무, 풀이 있는 마당에 들어오면 점점 그렇게 되어갔다. 아이와 함께 온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모 같은 존재는 누구였을까. 이런 장을 펼친 책방지기이기도, 함께 읽은 한 권의 책이기도, 부모 모임의 또래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당이 있는 곳에서 책과 더불어 어른과 아이가 함께하는 복합문화 공간을 꿈꾸었던 책방지기의 꿈이 이루어진 곳. 하지만 잠잠이(책방지기예명), 그녀는 꿈을 좀 다르게 이야기했다.
마당 있는 서점을 하는 꿈을 이뤘다고요? 근데 저는 그걸 꼭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일생일대의 꿈을 이뤘으니 그다음에 할 일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꿈을 이뤘다고 다뤄지니 부끄러웠어요. <모모>에선 꿈을 이루는 것이 가장 불행한 거라고 하잖아요. 꿈은 꿈을 생산해야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모모> 속 등장인물인 기기처럼 꿈이 끝이 되어버리면 안 되죠. 그동안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점점 공간이 부족하여 책방을 좀 더 넓게 꾸렸던 것뿐이에요.- 책 <서점은 내가 할게> 중 -
아기부터 청소년까지 참여할 독서 프로그램이 있고 다양한 분야의 저자와의 만남과 강연,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생활연극이 올려지는 곳. 거창하고 세련되지 않아도 책으로 생각하고 꺼내볼 수 있는 다양한 상상들을 실현할 수 있는 곳.
여기에는 아이들과 자라는 어른이 있다. 예술적 체험과 책으로 자아가 야물어진 아이들은 건전한 시민으로 성장할것이다. 이것이 잠잠이의 꿈이 생산한 또 다른 꿈이었을까.
회색신사가 만연한 현실에서 이곳에 발을 디딘 이들은 책방을 벗어난 세계와의 괴리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어느 청소년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책방에 오면 제가 착해지는 것 같은데 학교에 가면 그게 쉽지 않아요. 학부모들은 책방에서 나눈 가치와 공감으로 나름 쌓아 올린 교육철학이 선택이나 결정의 순간에 쉬이 흔들린다. 서점문을 나서는 순간 만나게 되는 이웃이나 학교의 현실은 헷갈리기에 딱 좋으니까. 그러면 어디에 장단을 맞춰 살아야 하나.
갈수록 생활용품 하나 사는 것마저 헷갈리(최저의 덧)는 유통방식과 과한 정보로 결정장애의 시대가 된 요즘. 개똥철학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변화라는 급류에 휩쓸려 나 하나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의 시대, 어두운 거리 불빛 같은 책방이 그리운 이유다.
아이를 키우며 교회처럼 드나들던 책방에서 일자리까지 얻어 독서지도사로 함께 했던 만 4년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참 오묘했던 시절이다. 자라지 않은 내면아이가 가득한 사람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이웃 아이들 정서와 생각에 관여하는 일을 하며, 마침내 내가 자랐다. 쉽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이 조금 괜찮아 보이던 시절, 어린이문학정신 다른 말로 동심이 참하게 부풀던 시절이다.
책방은 여전히 그곳에 있어도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그사이 잠잠이샘은 고인이 되었다. 흐르던 시간이 모퉁이를 도는 바람에 지금쯤 피기 시작할 마당 동백꽃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개화를 망설이고 있을지 모른다.
책방의 미래를 생각하면.. 엔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경험한 책방은 다시 시작될 책방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물이 많은 마당에는 수국이 물 만난 고기처럼 산더미로 핀다.
* 서점은 내가 할게 <책과 아이들> 25년의 기록/ 빨간집/ 2022년
*모모/미하일엔데, 한미희 역/ 비룡소